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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브리엘의오보에 Jul 30. 2019

같은 것 먹기


마음을 알고 싶은 대상은 비단 연애의 대상만이 아니다. 세상의 인간관계가 연애 관계와 비 연애 관계만 존재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경쟁 중인 상태의 마음도 알고 싶다. 그를 이기고 싶기 때문이다.


영화 ‘What Women Wants’는 판타지 장르를 빌어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공적인 마케팅을 낳는 과정을 보여준다. 주인공은 전기 충격으로 여성의 속생각을 귀로 듣는 듯 알게 되고, ‘아, 그렇구나!’를 얻은 후 성공적인 결과를 만들어 냈다. 그는 여성의 심리를 알아야 했다. 우리는 연애 상대, 경쟁자, 토론 대상자, 그리고 가족의 마음을 알고 싶어 한다. 왜? 나를 좋아하게 하기 위해, 경쟁에서 우위를 점해 이기기 위해, 토론에서 설복하기 위해 그리고 가족과 서로 웃으며 지내기 위해. 그렇다고 목욕탕에 물을 가득 채우고 들어가 전기 드라이기를 던져 넣을 수는 없지 않나? 벼락을 맞고도 살아난 사람이 있다지만, 그것은 생각할 필요도 없을 만큼 적은 확률이다.


먹는 방송, 요리하는 방송은 우리들에게 ‘해 보고 싶다’라는 자극을 준다. “복잡할 것 없습니다. 이렇게만 해도 맛이 납니다”라고 굳이 셰프가 이야기하지 않아도 과정을 보면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로 인해 ‘요리’ 혹은 ‘조리’할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마트도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고 있다. 요리에 필요한 재료를 한 곳에 모아 두거나 패키지로 묶어 가져가 냄비에만 넣으면 되도록 하고 있다.


음식은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열량과 건강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영양소라는 정량적 이점만 제공하지 않는다. 음식은 정성적 이점을 제공한다. 일본 만화나 에세이, 소설, 영화에 많이 나오는 장면이다. 음식 하나로 혹은 식사 한 번이 누군가의 가슴을 따스하게 하는 장면. 음식을 먹고 그동안 응어리진 마음이 풀린다던가, 따스한 어머니의 손길을 느낀다거나, 풍요로운 자연 속에 감싸이는 호들갑이라거나. 이런 영화적 효과 말고도 음식이 주는 정성적 이점에는 ‘실마리’가 있다.


비슷한 나이의 반려자의 마음도 알기 힘들지만, 아이의 마음은 더욱 알기가 힘들다. 비록 그 나이를 거쳐 왔다는 경험자의 자세를 유지하려 해도, 시간은 흐르고 시대는 변하며 환경은 달라진다. 따라서 겪는 환경에 따라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이 되어 간다. 내가 반, 나의 반려자가 반의 유전자를 물려주었다 하더라도, 확실히 ‘요새 아이들’은 우리와 다르다.


우리는 중학교에 가서 처음으로 영어를 배웠다. 우리 아이는 영어 유치원을 다녔다. 초등학교 수학, 중학교 수학은 이제 공부를 하지 않으면 가르치기 어렵다. 학교의 커리큘럼도 달라졌다. 우리는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되는 세대였다. 우리 아이는 3년간 채워야 할 의무 봉사 시간이 있다. 우리는 시험마다 점수와 등수(반/전교)를 받았다. 중학교 1학년까지 점수와 등수가 없는 성적표를 받는다. 대학에 갈 때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지 혹은 어떤 분야가 유망한지를 본격적으로 고민했다. 중학교 1학년 교과서에 ‘진로와 직업’이란 책이 있다. 결국 부모라도 ‘알면 얼마나 알겠냐? ‘라는 상황이 됐다.


내가 스마트 폰을 가지고 활용하던 나이는 30대로 기억한다. 우리 아이는 4~5살에 이미 스마트 폰으로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미용실에 앉아 있었다. 지금은 새로운 앱에 대해 내가 아이에게 배울 때도 많다. ‘내 맘 짚어 남의 맘’은 이미 물 건너갔다.


식사를 준비한다. 가사 분담이라는 거창한 의식이 아니다. 관심이 있고 나름 좋은 결과를 내니까 하게 된다. 부부도 서로 잘하는 분야를 전담하면 된다. 메뉴를 정할 때, 아이에게 도움이 되거나 아이가 먹는 메뉴를 주로 선택한다. 다행히 먹지 않는 메뉴나 식재료도 있지만, 꽤 폭이 넓어서 선택의 폭이 좁지 않다. 복 받은 것이다. 매운 것도 꽤 좋아한다. 내가 준비를 하거나 반려자가 준비를 하더라도, 아이의 표정을 살피고 모르겠으면 묻는다. “다시 메뉴로 정해도 돼?”라고. 이 장면만 본 사람은 아이가 메뉴를 결정한다고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 과정은 아이의 마음을 아는 과정이다. 


‘아이의 입맛이 변하고 있구나.’

‘오늘은 피곤한가 보다.’

‘다이어트 중이구나 ^^.’

‘많이 먹네. 마음에 드나 보다.’


어떤 분야든, 알기 위해 거쳐야 할 과정은 동일하다. 데이터의 조사, 반복 여부의 확인, 재현 시 실효성이 있는지 여부, 변화할 부분의 선정 및 변경/개선.


“어디서 먹어 봤어? 이젠 먹네!”


대화가 이어지고, 자신을 한 사람의 가족으로 인정함이 전달된다. 


“이번엔, 에스프레소처럼, 아이스 티 가루를 진하게 타서 물 없이 얼음에 그대로 부어 봤어. 단맛이 많이 줄지 않았지?”


내 입맛과 아이의 입맛 모두를 만족할 결과에 가까워진다. 내 기술도 향상된다. 사실, 가정식에서의 실력이란, 가족들이 놀라지 않고 즐겁게 먹을 수 있을 정도면 된다. 물론 가끔 긍정적인 놀라움도 필요하긴 하다. 따라서 조리 실력의 향상이란 가족의 만족도가 척도가 된다. 특히 이제 맛과 음식을 알아가며 자신의 기호와 식성이 형성되어 가는 아이는 요주의 대상이기도 하다.


모든 부모는 자신이 어린 시절 부모에게 받은 대로 아이를 대한다. 맞고 큰 부모는 체벌을 과정으로 여긴다. 잔소리 속에 성장한 부모는, 자신은 싫더라도, 당당하게 육아의 방법으로 잔소리를 택한다. 부모에게 존중받고 자란 부모는 아이를 존중한다. 물론 체벌이나 잔소리 속에 성장한 부모도, 악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 태도를 향상시킨 예도 많을 것이다. 


당신과 아이 사이에 음식이 놓이면, 어떤 이야기를 하는가? 당신은 아이의 마음을 알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나? 이 글이 필자의 자기 자랑 같은가? 혹시, 한 가지 예를 들었을 뿐인데, 손에 닿지 않는 세상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 같은가? 필자 역시 배우는 중이다. 배우려는 부모가 늘어날수록 세상은 더 따스해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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