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확신에 대한 불안감
끊이지 않고 확인하는 사람이 있다.
"그건 이거 아닌가요?"
"맞죠? 그건 이거죠?"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맞으면, 배시시 웃는다. 지속 확인자는 불안한가 보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맞는지, 그것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행동해도 되는지. 여기에 용기를 내어도 되는지도. 그런데 이들이 문제가 되는 점이 같은 의견 혹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주위에 모아 한 사람을 둘러싼다는 것이다.
인생에 욕심 없는 자가 있다. 그냥 호기심에 하나 배운다. 열정을 가지고 속속들이 배우지는 않는다. '아, 그렇구나' 정도에서 멈춘다. 그 정도면 필요한 부분으론 충분하다는 듯. 욕심 없는 자는 존재감이 없어 대중들의 시야 안에 존재하는 일이 적다. 그래서 그들은 열정적으로 무엇을 배울 필요가 없다. 자신이 만족하는 만큼 배우고, 자신의 손에 맞게 변형시켜 산다. 그래서 이 방법이 세상의 표준인지, 혹은 정해진 원칙인지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이런 욕심 없는 자를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
지속 확인자의 시야에 욕심 없는 자의 이러한 행동은 신경 쓰이는 행동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약간 다른 형태로 무언가를 알고 있고 그것으로 무엇을 해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지속 확인자는 타인을 부른다.
“이 방법이 맞나요?”
“어, 좀 특이한 방법이네”
혹은
“보통은 이렇게 안 하는데”
라는 말이 들려오면
“그럼 이건 이렇게 하는 것이 맞죠?”
하며 최종 확인에 들어간다.
그 사이 욕심 없는 자의 얼굴은 홍조에 물든다. 자신은 원하는 만큼 알고, 그것에 기반해 조용히 일을 하는 것인데, 그것이 정답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무대에 타의로 올라가게 된다. 그리고 '올바르지 않은 방법을 사용하는 자'가 되어 무대를 내려오게 된다. 왜 그들은 자신의 의견을 입증하려 하지 않을까? 그 정도까지 알지 못해서? 아니면 혼삶의 영역을 지키고 싶어서?
지속 확인자는, 자신의 불안함을 잠재우기 위해, 욕심 없는 자의 이런 평화를 깨뜨릴 때가 있다. 그렇다고 지속 확인자가 밖으로 보인 모든 행동이 '악'한 행동인가 하면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욕심 없는 자는 상처를 입는다. 여기서 욕심 없는 자가 자신이 상처를 입었다고, 지속 확인자가 자신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이를 응징하겠다고 나서면, 욕심 없는 자에게는, 원래의 행보에서 벗어난 죄로 또 하나의 굴레가 타인의 시선을 통해 머리 위에 씌워진다. '악의 없이 확인한 자를 악하다 몰아세운 죄.’ 이런 일이 있은 후, 욕심 없는 자는 자신의 공간을 더욱 깊이 파고 그곳에 잠수한다. 세상의 빛에 닿지 않으려고 더욱 깊이 들어가고 벽을 더 공고히 쌓는다.
필자는 이런 행동을 하는 지속 확인자를 싫어한다. 지속 확인자가, 불안함 해소를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이 진짜인지 확인하는 습성에는 불만이 없다. 그러나 타인의 방식이 맞는지, 그 분야 전문가가 아닌 대중에게 확인하여, 누군가에게 다른 색을 입히는 행동에는 불만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순수한’ 확인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그것으로 충족되고 쾌락충주가 채워지는 것 같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 진실, 세상의 원칙에 변동이 없음을 확인하는 것이 인생의 사명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솔직히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간혹, 지속 확인자가 아는 방법이 틀리다고 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때가 있다. 이 사람들은 지속 확인자도, 욕심 없는 자도 모른다. 단지 물어보니, 답했을 뿐이다.
욕심 없는 자가 하는 방법이 틀린 것은 아니라고. 지속 확인자가 알고 있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 아니라고. 이렇게 불안감이 상승하면 지속 확인자는 불안함을 잠재우기 위해 더 많은 사람을 욕심 없는 자 앞에 세워 입증해달라고 고양이 눈을 뜬다. 어떻게 해든, 주위의 사람들 입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진실이라는 대답이 나오게 하려 한다. 별일 아닌 것이 사회 문제로 보이게 된다. 논쟁이 붙는다. 그러고 시간이 흘러, 이런 상황에서 벗어난 후, 지속 확인자의 입에서는 이런 말이 나온다.
“거기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더라고.”
아~
이들도 인간이지. 숨을 쉬고, 자신이 아는 만큼 행하는 인간. 세금을 내고, 먹고 싸고 내일의 아침 해를 맞이하는 인간. 남들이 맞는다고 말해야 안심이 되는 습성을 지녔을 뿐이지. 맞는지 확인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니 그들을 악으로 규정할 결정적 기반은 없는 셈이다. 용심 없는 자의 마음은 어떻게 위로해야 하나? 누군가의 기억에 ‘죽여 버릴 만큼 철딱서니가 없는 인간’으로 남게 하면 되지. 상처 입히고 용서 받고 상처 입히고 용서 받고를 반복하게 해서 그들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것을 절대 깨닫지 못하게 해야 할 인간들. 그렇게 순순히 선해 지게 못하게 해야 할 인간들. 왜냐고? 왜 이렇게 밖에 미워할 수 없냐고? 그들은 자신의 행동이 누군가의 가슴에 대못 같은 상처를 준다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