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펄 끓는 물
올해 초까지 커피를 내릴 때 ‘끓기 전 물’을 사용했다. 커피 내리는 법을 기술한 책을 보니 중배전이냐 강배전이냐, 신 맛이 큰 지 쓴 맛이 큰 지에 따라 커피를 내리는 물 온도가 달랐다. 하지만, 원두의 종류에 무관하게 섭씨 100도 미만으로 물을 끓이고 그 물로 커피를 내렸다. 원두 종류에 무관하게 그 온도의 물로 내린 커피가 좋았다. 물 온도를 맞출 때 온도계를 꼽는, 손이 가는 작업은 하지 않았다. 전기 주전자 혹은 가스 불 위의 주전자 물이 끓기 전, 다시 말해서 부글거리기 전에 전기 주전자의 스위치를 내리거나 가스 불을 껐다.
고급 원두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마트에서 중량 대비 가장 싼 원두를 구입한다. 보통 1.3 kg에 13,000~14,000 원 정도의 분쇄 가루를 구입한다. 이런 종류의 제품이 가장 저렴하기 때문이다. 간혹 1 kg 기준 18,000~25,000 원 사이의 통 원두가 할인을 하는 경우엔 할인된 수준을 보고 구입하곤 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값싼 원두로 맛있는 커피를 내릴 수 있는 역량’을 보유하고 싶어서 이다. 그리고 매대에서 가장 저렴하더라도 ‘유통 기업이 판매 상품으로 선정한 제품이 아닌가‘라는 안일함도 이런 결정을 거들고 있다.
맛있는 커피의 기준은, 캡슐 10개에 6,500~7,700 원 하는 커피로 머릿속에 각인한다. 내리는 커피 원두 가루의 굵기, 분량 등을 조정해 본다. 나는 진한 커피를 좋아하지만 아내는 각이 선, 진한 커피보다 마일드 한 맛을 좋아한다. 한 번 내린 커피로 두 사람의 입맛에 맞게 조정한다. 방법은, 진하게 커피를 내리고, 아내의 잔에는 커피 내리는 물을 약간(320 ml 머그 기준 바닥 전체를 덮는 분량) 넣어 둔다. 컵의 온도도 약간 높이지만, 날카로운 맛의 각을 부드럽게 다듬는 역할도 한다.
더치커피를 내리는 모습을 처음 봤을 때, 기구를 사서 따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맛을 보고 싶었고, 맛을 봤고, 이후 그다지 자주 주문하지는 않았다. 어느 날, 끓이지 않은 물로도 커피가 우러나올지 궁금했다. 인터넷에서 검색을 하면 답을 알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유리병이 생기길 기다렸다. 500 ml 정도의 유리병. 평소 파스타를 좋아하다 보니, 소스를 직접 만들기도 하고 기성 소스를 사다가 사용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마음에 드는 병이 손에 잡혔다. 500 ml 용량이고, 한 손에 잡히는 직경이었다. 원두를 그라인더에서 갈아 50 g의 가루를 만들었다. 에스프레소용보다 더 굵기가 작았다. 깨끗이 세척한 병에 가루를 넣고 천천히 정수 물을 부어 넣었다. 마개에 랩을 씌우고 뚜껑을 닫았다. 가을 중반이라 창가 그늘진 곳에 하루 동안 놓아두었다. 다음 날 개봉을 하고, 드리퍼에 여과지를 넣고 병의 내용물을 천천히 여과지에 쏟았다. 너무 적은 굵기여서 그런지 드립 속도가 느렸다. 커피 물이 다 내려가면 다시 붓고 다 내려가면 다시 부어 ‘물을 끓이지 않고 우린 커피’를 완성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콜드 브루라고 이미 있는 기법이었다. 창의에 대한 열망은 없고 실험해 보려 했으니 내가 최초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았다. 대신, 얼음으로 쉽게 희석되지 않은 아이스드 커피를 발견했다. 커피에 물을 넣고 냉장실에 하루를 두는 방법이다. 24 시간 정도를 그렇게 우려내면, 얼음을 넣어도 쉽게 희석되지 않는 커피를 얻는다. 이후 여름엔 이렇게 시원한 커피를 만들어 마셨다.
지난해에 이어 폭염이다. 지난해 40도 가까이 오르던, 그 상황은 아니었지만, 체감을 기준으로 폭염은 폭염이다. 여름이 시작되면서 예의 아이스드 커피를 우려 마셨지만, 7월 중순을 넘어서면서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이유는 모른다. 변화가 반드시 ‘특별한’ 이유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굳이 이유를 대자면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싶었다.
에어컨은 실내 온도가 30도가 넘으면 제습 모드로 1 시간 동안 가동하고, 동시에 선풍기를 회전 모드로 가동해 실내 전체 공기를 움직이도록 했다. 실내 온도가 빠르게 내려간다. 에어컨과 선풍기를 가동해 두고 샤워실로 들어가 냉수 샤워를 한다. 훨씬 신속히 시원해진다. 땀으로 끈적이는 피부보다 뽀송한 피부에 닿는 냉기가 더 좋다.
뜨거운 커피는 이런 시원함 속에서만 마시진 않았다. 환기를 위해 앞뒤 창문을 모두 열고 외부 열기가 함께 들어오는 상황에서도 뜨거운 커피를 마신다. 더구나 이번 뜨거운 커피는 펄펄 끓는 물로 내린 커피다. 원두의 값이 쌀수록 드립 커피 원두 가루 두께보다 약간 작은 두께로 원두를 갈고, 펄펄 끓는 물로 커피를 내리면 원두 내 모든 맛을 다 뽑아내는 기분이 든다. 훨씬 진한 커피를 얻는다. 저렴하지만 괜찮은 맛을 즐긴다.
나는 올해 여름, 펄펄 끓는 물로 내린 커피를 폭염 커피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열치열도 아니다. 여름이니 더욱더 끓인 음식을 먹자고 덤빈 것도 아니다. 단지, 내가 원하는 것을 행했고, 기대만큼 맛있는 체험을 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오후 10시, 90도 정도의 물로 내린, 이미 분쇄되어 판매되는 원두로 내린 커피를 마시고 있다. 펄펄 끓인 물로 내린 폭염 커피는 아니다. 따스한 커피다.
드립 커피는 서버에 내리지 않고 텀블러에 직접 내린다. 커피를 내리고 바로 뚜껑을 닫으면 오래도록 일정 온도의 커피를 즐길 수 있다. 지금 내 곁에는, 텀블러에 직접 내린 커피가 500 ml(한 잔 따랐으니 350 ml) 있다. 이미 첫 모금은 마셨다. 뜨거운 커피를 마신다고 땀이 쏟아지지 않는다. 2019년 8월 20일은 일교차가 커서 아침 밤은 20도 내외, 오후는 30도 내외이다. 저녁 일과를 마치고 여전히 냉수로 샤워를 하지만, 따스한 향기가 오르는 커피를 마시고 있다, 땀을 흘리지 않고도. 여름에 따스한 커피가 주는 맛을 보고 있다. 좋다.
아, 귀에는 Classical Guitar 음악이 이어폰을 통해 닿고 있다. 작은 가벼운 노트북, 냉수 샤워 후의 뽀송함, 땀을 내지 않는 따스한 커피, 그리고 Classical Music. 좋다. 살짝 유사한 폭염 커피,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