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브리엘의오보에 Apr 16. 2020

추억을 만드는 그림

소설

햇살이 따스한 오후다. 카페 테르마이 thermæ는 도로 쪽으로 난 전면 창으로 유명하다. 4 계절 내내 따스한 햇살이 들어와 움츠린 어깨를 데운 듯 서서히 펴게 한다. 카페 이름처럼 온천에 몸을 담그고 있는 느낌이다. 뜨거운 음료를 파는 주막이란 의미도 가진 테르마이는 스트레스에 절어 있는 사람들에게 오아시스였다.


창으로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 온천에 몸을 담근 듯 포근한 의자와 따스한 음료. 도시인의 오아시스임에 틀림없다. 전면 창은 남쪽을 향해 나 있다. 전면 창을 측면에 둔 테이블은 총 3개. 각 테이블에는 두 사람이 여유 있게 앉을 수 있는, 직물 소파가 두 개씩 놓여 있다. 보기에 팡팡한 소파인데 부드러운 원단의 좌석은 엉덩이를 살며시 감싼다. 그대로 등을 기대면 등도 약간 안긴 듯 파묻힌다. 마치 어렸을 때 아버지 허벅지 위에 앉아 등을 아빠 배에 기대고 있는 느낌이다. 


실내 온도는 1년 내내 섭씨 27도를 유지한다. 출입문은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의 남쪽에 위치한다. 겨울이면 출입문을 열고 들어와 섭씨 25도를 유지하는 입구 공간에 서서 밖에서 묻혀 온 추위를 떨군다. 눈을 맞았으면 눈을 털고 들어온다. 봄을 맞아 봄비를 즐기다 들어온 고객들은 우산을 접어 꽂이에 꽂고 벽에 걸린 얼굴 수건으로 어깨와 겉옷에 묻은 빗물을 털어낸다. 여름엔 입구 공간이 섭씨 30도를 웃도는 외부와 섭씨 27도의 내부 사이에서 완충역할을 한다. 장마철에는 젖은 신발을 건조기에 넣고 실내화로 갈아 신을 수 있다. 카페 테르마이는 ‘배려의 손길’이기도 하다.


바리스타는 바에 앉은 손님을 간간히 쳐다본다. 커피 잔이 비면 1잔의 무료 리필을 채우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번 손님은 아직 한 모금의 커피도 마시지 않았다. 4월이라 꽃샘추위 때문인지 재킷을 입고 들어왔다. 재킷은 벗어 옆 좌석에 접어놓았다. 커피를 주문하고, 커피가 나올 때까지, 커피가 나온 후 지금까지 시선은 남쪽 창을 향해 있다. 


전면 창 밖에는 도시 중심의 번화함이 가득하다. 왕복 10 차선의 넓은 도로가 한 눈에 들어온다. 양쪽 보도에는 평일이든 휴일이든 많은 사람들이 오간다. 도로 양쪽의 가로수가 싹을 틔웠다. 손님의 시선은 창 밖 가로수에 돋은 새 싹을 보는 것 같지만, 언뜻 보기엔 가로수 너머 먼 곳을 향해 있다. 조금은 슬프고 조금은 힘이 빠진 표정. 시간은 목요일 오후 3시. 만일 회사원이라면 잠시 나온 것일 것이다. 인근 회사에 다니는 것이 아니라면 어딘가 차를 놓고 왔을 것 같다. 그렇게 단출한 차림이었다.


“커피가 식었네요. 다시 드리겠습니다.”


바리스타의 목소리조차 듣지 못한 것 같다. 잠시 뜸을 드린 후 바리스타가 손님 잔을 잡고 들어 올리자 “아!” 하며 손님이 돌아본다.


“커피가 식어서 다시 드리려 합니다. 괜찮으십니까?”

“아, 네!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먼저 서빙 된 커피와 동일한 양이 커피 서퍼에 남아 있다. 커피 서퍼는 온도를 50도로 유지하는 기구 위에 놓여 있다. 서퍼는 커피가 증발되지 않도록 뚜껑이 덥혀 있다. 뚜껑을 돌려 배출구가 앞을 향하게 하고 새로 데운 잔에 커피를 따른다. 카페 테르마이는 머그 컵이나 큰 사이즈의 컵을 사용하지 않는다. 고전적인 커피 잔을 사용한다. 대신 커피 잔의 손잡이는 두 번째 손가락 직경보다 넓어 들기 편하다.


카페 테르마이에 같은 잔은 없다. 이 손님에게 서빙 된 첫 잔은 유백 색 컵 받침에 유백색 잔이었다. 두 번째 커피는 바다빛 청색이 가득 사용 되고 하얀 선으로 곡선이 교차하는 패턴의 잔이다. 투명한 바닷물은 연두색에 가깝지만, 약간 더 깊은 곳의 수면은 탁하지만 답답하지 않은 청색이다. 시름에 마음이 깊이 가라앉은 것 같진 않지만 가로수 넘어 멀리 있는 무엇을 쳐다보는 손님의 눈빛과 비슷하다고 바리스타는 생각했다. 사용할 잔은 따스한 온도를 유지하는 판에 거꾸로 놓여 있다. 바리스타의 왼쪽부터 하나씩 꺼내 쓴다. 그러니 어떤 디자인의 잔이 사용될 지는 바리스타도 모른다.


“미안합니다”를 끝으로 손님의 시선은 밖에서 돌아와 바를 향해 있다. 딱히 바 위 무엇을 보는 것 같진 않다. 두 번째 잔이 서빙 되어 손님 앞에 놓는 모습을 보는 것 같지는 않다. 바리스타의 손이 바 안쪽에서 바깥 가장자리로 움직여도 시선이 이를 좇지 않는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는 것일까? 


활기차고 경쾌한 인상은 아니다. 긴 머리끝에 약간의 웨이브, 빗질이 잘 된 헤어스타일. 재킷을 벗은 블라우스 차림의 상체는 유백색 블라우스만큼 스타일 좋게 아래로 향한다. 치마는 재킷과 매칭 되는 붉은 색이 많이 사용된 A형 치마. 하지만 한 벌은 아닌 것 같다. 무릎 위에서 끝난 치마에 하얀 스타킹, 단정한 구두까지. 차분하고 얌전한 인상의 손님이다. 


차분하고 얌전한 인상에 우울함이 깃든 손님은 하얗고 가는 손가락으로 커피 잔을 살짝 감싸 잡고 있다. 시린 손을 녹이는 듯.


“저기...”


설거지거리를 모은 대야 쪽으로 향하던 바리스타는 발길을 멈추고 몸을 돌려 손님의 목소리에 반응한다.


“네”

“저기 창가에 앉아 계신 분은 화가신가 봐요.”


캐주얼 차림의 여자. 나이는 잘 모르겠다. 그녀의 손에 8 절지 스케치북이 들려 있고 하얀 도화지 위에 4B 연필의 굵은 자국이 그 여자의 손길에 따라 굵기를 달리한다. 전면 창 좌측 끝 테이블에 앉아 있다. 짙은 고동색 테이블 위에는 그녀의 것인 듯 가죽 필통이 열린 채 놓여있다. 그 곁에는 지우개와 그녀가 마시던 것 같은 머그 잔이 놓여 있다. 머그 잔이 없는 카페인데. 그 옆에는 이슬이 꽤 맺힌 유리컵이 투명하게 물을 담고 있다.


“화가..라기 보다 스케쳐입니다.”

“스케..쳐요..”

“네. 채색은 하지 않고 연필로만 그려서 그렇게 부릅니다.”

“아! 자주 오시는 분인가 봐요.”

“자주 온다고 할 수 있죠. 매일 저 자리에 앉고. 저 자리는 그녀의 자리입니다!”

“그녀의 자리..”


그녀는 시선에서 우울과 침울을 거두고 대신 호기심을 채우는 듯했다. 우울과 침울이 걷히니 하얀 얼굴이 환하게 보인다. 창백한 얼굴에 가라앉은 시선이 눈길을 끌던 손님의 눈이 호기심으로 채워지면서 얼굴은 화사할 정도로 환해졌다. ‘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매력적인 얼굴로 변했다.


“그녀는 추억을 만드는 스케쳐입니다.”

“추억을 만들다니..”

“좀 올드 한 명칭이죠? 그녀가 그리는 그림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손님은 바리스타의 얼굴을 처음 쳐다보는 듯 시선을 돌린다. 조금 흐뭇한 분위기. 직원과 주인의 관계는 아닌 것 같다. 스케..쳐라는 호기심이 바리스타의 표정을 보자 더 증폭된다. 


“혹시, 누군가에게 스케치를 그려주시나요?”

“네.”

“아무에게나...”

“그녀에게 이야기를 한 사람에게 그림을 그려줍니다. 마음속에 숨겨둔 이야기,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기억을 이야기합니다. 대부분 아픈 기억이거나 상처 있는 기억들이 많았습니다. 그럼 그녀가 하루 동안 그림을 그린 후 다음날 전해드릴 겁니다. 신기하게도 그 그림을 보면, ‘이렇게 됐다면 좋았을 텐데’라는 이미지가 담깁니다. ‘만일 그가 웃어 주었다면...’, ‘만일 그가 손을 내밀어 주었다면...’ 바랐던 일이 그림으로 나타납니다. 어떻게 알고 그런 그림을 그리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림만으로 마음이 위로되니까요.”

“아...”


이제 손님의 눈길은 스케쳐를 향한다. 손님의 뒤통수에는 ‘과연..?’, ‘어떨까?’라는 물음표보다 ‘혹시..’라는 희망이 보인다. 가로수 넘어 먼 곳에 향해 있던 시선, 우울함과 침울함으로 하얗기만 했던 얼굴. 떠오른 호기심으로 얼굴이 화사해진 손님. 궁리와 생각으로 화사함이 줄어들었지만 우울하다거나 침울하진 않다. 그녀 주위로 망설임이 일렁이고 있다.


옮기려던 설거지거리를 설거지 통으로 옮긴다. 두 번째 잔 역시 식어가고 있다. ‘아! 커피가 저렇게 방치되다니!!’ 바리스타는 어쩔까 생각했다. 커피가 너무 안 됐다고 생각했다. 


“한 번 시도해 보시겠어요?”

“네?”


갑작스러운 질문에 놀람이 손님의 눈동자를 키웠다.


“커피는 테이블로 옮겨 드리겠습니다.”

“....”

“저기...”

“네”

“이야기를 하고 나서는 어떻게 하나요?”

“다음 날 혹은 그 이후에 카페로 오시면 그림을 드립니다. 그림을 받으시고 돈을 내시면 됩니다.”

“아! 그렇겠군요!”

“네, 그렇습니다.”


부드러운 미소가 바리스타 얼굴에 피어올랐다. 손님의 얼굴에 홍조가 스쳤다.


“얼마를...”

“그건 그녀가 그림에 적어둘 겁니다. 지금까지 비싸지는 않습니다. 커피 한 잔 값 정도였습니다.”

“저.. 카드...”

“네, 계산은 카운터에서 하시면 됩니다.”


바리스타의 입이 활짝 핀 미소만큼 벌어진다. 아까보다 더 짙은 홍조가 그녀의 얼굴에 남는다.


“당장 결정하지 않아도 되나요?”


아직 결심이 서진 않은 것 같다.


“그럼요! 원하실 때 그녀에게 다가가시면 됩니다.”

“아.. 네...”

“커피, 새로 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바리스타는 두 번째 잔을 들어 바로 옮긴 후 수동 그라인더에 원두 콩을 넣고 천천히 핸들은 돌린다. 기분 좋아지는 냄새가 코끝에 돈다. 


갈아낸 원두를 융 필터에 붓고 서퍼 위에 놓는다. 가루 표면이 젖을 만큼만 따뜻한 물을 묻는다. 30초 정도 뜸을 드린다. 아까보다 향이 짙어진다. 약간 다르지만 기분 좋아지는 향인 것은 변함없다. 첫 번째 드립을 한다. 필터 위로 짙은 김이 피어오른다. 서퍼에 “토도독”라고 커피가 처음 닿는 소리가 들린다. 잠시 기다린 후 바리스타는 두 번째 드립을 한다. 서퍼에 커피가 내려 쌓인다. 서퍼에 내려진 커피 표면 주위에 김이 서린다. 다시 대기. 그리고 세 번째 드립을 내린다. 아까보다 더 짧은 시간 동안 기다린 후 가루에 부은 물이 다 내려가기 전에 융 필터를 들어낸다. 딱 2 잔 분의 커피가 서퍼에 쌓였다. 그 중 한 잔을 잔에 붓고 손님 앞에 놓는다. 익숙한 행동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번엔 커피가 입으로 향한다. 가로수 너머 먼 곳에 있던 시선이 커피 잔 안으로 향한다. 아무런 감정은 없어 보인다. 단지 기분이 포근해진 모습이다. 실내 온도 섭씨 27도. 사람에 따라 서늘하게 느끼는 경우도 있다. 경험의 이야기지만,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 몸이 따스해지는 것을 분명히 감각할 수 있게 하는 온도다. 눈정신 없게 선전물을 바리바리 내세우지는 않지만 나름 마케팅을 하고 있다고 바리스타는 생각한다. 고객은 자신의 체험을 통해 판단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서빙 되어서 인지 손님은 천천히 하지만 잔을 내려놓지 않고 커피를 마신다. 절반 이하가 남았을 때 “챈”하고 잔을 받침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입을 약간 오물거리며 남은 커피 맛을 보는 것 같다. 바리스타가 좋아하는 유형의 손님이다. 자신이 집중해서 내린 커피를 끝 맛까지 음미하는 손님. ‘다시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스케쳐는 그리던 그림을 완료했는지 팔을 펴고 그림에 집중한다. 아마 마음에 들었다면 손님용 봉투에 넣을 것이다. 아니면 자신의 가방에 넣고 자리를 털고 일어날 것이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 카페 닫을 때쯤 그림을 들고 나타날 것이다. 그 때에 맞춰 그녀가 맡긴 텀블러에 한 잔의 커피를 담아 주면 된다.


그림은 손님용 봉투에 넣어졌다. 스케쳐는 봉투를 들고 바로 들어서 찬장을 연다. 이것저것 꺼내더니 붉은 덩어리를 잘라 작은 국자 같은 것에 넣고 싱글 인버터 전원을 켠다. 잠시 후 고무 녹는 향이 났다. 그리 심한 것은 아니지만 커피 향 사이에서 존재감은 드러내는 정도. 인버터 전원을 끄고 손님 봉투의 입구를 접고 봉투 입 중간에 녹인 것을 살짝 붓는다. 그리고 도장 같은 것을 들고 그 위에 꾹 누른다.


이렇게 마무리가 된 봉투는 계산대 뒤 선반에 세로로 세운다. 그리고 몸을 돌려 바의 안쪽으로 간다. 몸을 돌려 찬장을 열고 빨간 유리병을 꺼낸다. 소형 그라인더도 꺼낸다. 빨간 유리병을 열고 그라인더에 붓자 원두 콩이 후드득 떨어진다. 소형 그라인더 절반 정도를 원두 콩으로 채운다. 천천히 핸들을 한 바퀴 놀린다. 아래 서랍을 열고 가루를 보더니 핸들 끝 손잡이를 약간 돌려 조정한 후 다시 핸들을 한 바퀴 돌린다. 다시 서랍을 열고 가루를 보더니 그대로 핸들을 천천히 돌린다. 


원두를 다 갈고 커피를 꺼낸 찬장에서 청색 머그 잔을 꺼내고 그 위에 도기로 된 드리퍼를 올린다. 종이 필터 끝을 접어 드리퍼 안에 놓고 전기주전자에 물을 부은 후 스위치를 켠다. 주전자 입에서 김이 오르고 막 끓기 시작할 때 전기주전자를 끈다. 종이 필터가 꽂힌 드리퍼와 끓은 물이 담긴 전기주전자를 들고 싱크로 가서 전기주전자의 물을 종이 필터 위에 붓는다. 종이 필터가 도기 드리퍼에 찰싹 달라붙는다. 그대로 물이 빠지길 기다리다가 절반 정도 남은 물을 손목을 돌려 쏟아낸다. 


갈아낸 가루를 종이 필터에 살살 붓고 표면을 평평하게 고른 후 가루 표면이 젖을 정도로 물을 붓고 30초 정도 뜸을 드린다. 그리고 세 번에 나누어 끓인 물을 부어 커피를 내린다. 머그 잔에서 드리퍼를 치우고 사용했던 기구들을 정리하여 찬장에 되돌려 놓는다. 머그 잔의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잠시 음미한 후 사용한 기구를 설거지 해 건조대 위에 놓는다. 머그 잔을 들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 창가로 몸을 돌려 앉고 천천히 커피를 마신다.


손님은 그녀가 바에 들어갈 때부터 다시 나와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실 때까지 눈으로 쫓았다. 헐렁한 폴라 티에 붙지 않는 베이지색 면바지. 하얀 농구화 풍 스니커즈. 좌석 옆에 접혀 있는 항공 잠바와 약간 두툼한 비니. 8절지 스케치북이 들어갈 넓이의 가죽 숄더백. 가방에 손때가 묻은 것이 여러 곳을 함께 다닌 모양이다. 


‘편안해 보여’


손님은 바 좌석에서 일어나 소지품도 놓아둔 채 그녀에게 다가간다.


“실례 합니다.”

“네!”


크지 않은 목소리. 밝고 활달한 기운이 훅 다가온다. 더불어 눈도 동그랗게 커진다. 방금 자연스럽게, 자기 주방인 듯 움직이던 행동이 그대로 표정으로 전해진다.


“그림을 그리신다고..”

“네.”


‘So What(그래서, 뭐)?’라는 느낌의 시선. 차갑지 않은 시선이 닿는다.


“여기 앞에 앉아 이야기하면 되나요?”

“네! 지금은 우리 둘 뿐이니..”


손님이 바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바리스타가 서서 바 안쪽을 천천히 청소하고 있다.


“걱정 마세요!”


밝은 목소리 탓인지 그녀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목소리에 별 다른 것도 없는데 믿음이 생긴다. 그 목소리에 긴장이 풀렸는지 손님의 미소가 자연스럽다.


“네..”


손님은 스케쳐 앞에 앉는다. 자연스럽게 앉았다. 긴장되어 보인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이야기다.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앉아 있다. 할 말을 머릿속에서 정리하는지, 아직도 망설이는지 알지 못하겠다.


고개가 천천히 들린다. 정리가 된 모양이다. 이야기를 정리했는지 결심을 했는지 모르지만 긴장은 옅어지고 결심이 짙어진 모습이다.


“저는...”


햇살은 석양으로 바뀐다. 전면 창 우측에서 붉어진 빛이 들어온다. 하루가 점점 지나간다. 이제 실내 등과 간판 등을 켜야 할 시간이다. 바리스타는 저녁 서비스 준비를 시작한다. 


계산대 옆 유리 테이블에서 케이크를 덮은 뚜껑을 연다. 카페 테르마이는 저녁에만 스낵을 판다. 오후엔 드립 커피 한 종류만 판다. 여러 가지 마련된 원두 콩에서 희망하는 것을 선택할 일도 없다. 원두 콩은 매일 바뀌지만 한 종류뿐이다. 재미있는 라테 아트도 없다. 머그 잔도 없다. 서비스되는 것은 150 ml의 커피 잔에 담긴 드립 커피, 무료로 1회 리필, 희석이 필요한 고객은 따스한 물을 요청할 수 있다. 오픈부터 저녁 전까지는 커피만 서비스 한다.


저녁에 되면 과일 생크림 케이크, 뉴욕 치즈 케이크가 추가된다. 모두 이 카페에서 만드는 케이크라 다른 어떤 곳에서도 맛을 보지 못한 케이크가 나온다. 과일은 싱싱한 생물 그대로 얹혀 반짝이거나 하지 않다. 가끔 슈거 파우더가 뿌려져 있긴 하다. 생크림은 제과점의 그것보다 연질이라 느껴진다. 단맛은 있지만 도드라지지 않는다. 뉴욕 치즈 케이크는 느끼하지도 찐득거리지도 않다. 맛있지만 ‘커피와 함께 먹으면 딱 적당한 정도’의 치즈 맛이다. 무슨 치즈를 썼는지 알려주지 않지만 이런 치즈 케이크는 카페 테르마이에서만 판다.


스케쳐와, 마주 앉은 손님은 이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가 언제 끝날지는 모른다. 때로 카페 문을 닫을 때까지 끝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럼 바리스타는 이야기를 방해하지 않게 조심하고 카페 정문의 덧문을 닫는다. 간판 불을 끈다. 실내 등은 그대로 둔다. 그런 다음 바 안쪽 방에 들어가 하루를 정리한다. 설거지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끝나고 나서 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신규 작곡, 클래시컬뮤직,국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