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하고 엄청난 이야기를 쓰려고 해도 거창하고 엄청난 소재가 개인에게 매번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정말 그럴까?
스마트폰의 휴대와 인터넷 접속 및 검색, 다양한 앱의 푸시 서비스, 가입한 뉴스 레터, 틀면 그냥 나오는 TV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매일 엄청나고 거창한 이슈들과 만난다. 그런데 왜 나는 거창하고 엄청난 글을 쓸 수 없을까, 이렇게 이슈가 매일 내게 다가오는데?
들은 말을 그대로 전하는 이를 '팔랑귀 팔랑입'이라 칭한다. 귀-잠시 저장-입의 프로세스에 익숙해져 있고, 간혹 수신되는 청자의 re-action이 재밌다. 그 재미는 곧 끝나지만 또 맛보고 싶다. 이것이 반복되면 일정 범위의 이슈는 귀-잠시 저장-입의 프로세스만 통과한다. 이렇게 전할 뿐인 '내가 하는 이야기'는 굳이 내가 쓰지 않아도 된다. 세상에는 나보다 높은 역량의 팔랑귀 팔랑입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내가 끼일 틈이 없다. 그들의 미사여구는 화려하고 매력적이다.
거창하고 엄청난 글을 쓸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쓸 수 있을까? 어쩌면 '쓸 수 없는 것은 나'라는 문제점보다, 내가 그 주제 혹은 사건에 대해 익숙하지 않은 것일 것이다. 깊고 넓게 알아보고, 깊고 넓게 생각하고, 해당 주제가 익숙해지면 '누구나' 거창하고 엄청난 글을 쓸 수 있다. 소설, 수필, 산문, 시 등 장르에 구분 없이. 국내 작가 중 주목을 하고 신작은 빠짐없이 읽는 작가가 있다. 역사에 대한 조예가 깊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글의 배경이 되는 시대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아니, 익숙하다고 생각한다. 그 위에 fiction을 풀어내기 때문에 내가 그의 작품을 기다리고 읽는지 모른다.
깊고 넓게 알아보다. 그 주제가 무엇에 관한 것인지 조사한다. 그 주제의 주체가 누구인지 확인한다. 그리고 주체와 주요 주변 존재의 역학과 인과관계를 지속적으로 탐색한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하는 일을 흉내 내 본다. 물론 흉내는 머릿속 가상 시나리오를 통해서다. 그들과 같은 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 거창하고 엄청난 일을 행하는 이들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 위해. 왜 그들은 그렇게 행동했을까를 좇다 보면 이야기가 될 상황이 생각나지 않을까? 왜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려 했을까? 정도전의 꾐에 넘어가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 옥죄이기 때문에 그 타결책으로? 단지 석가래 3개를 지고 나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머리로 당시의 판단을 생각하는 것만큼 역사의 왜곡은 없다. 공신력 만으로 그것이 우리 역사라고 믿는 것만큼 우둔한 것도 없다. 지금까지 그런 방식으로 역사를 정리해 왔기 때문에 그 외의 방법에 손을 대면 지금의 위치가 부정될 수 있다는 생각만큼 역사를 왜곡하게 된다. 사실에 대해 개인이 조사할 수 있는 범위는 한정적이다. 직접 취재는 오히려 더 어울리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려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사실의 전후와 인과관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가 가장 중요하다. 사실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알고 나온 내 생각이 이야기가 된다고 생각하면 이 글의 주제에 맞다.
깊고 넓게 생각하다. 마인드맵을 그려본다. 생각나는 대로 작성하고 맥이 통하게 정리하기에 경험상 가장 편리한 도구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생각나는 대로 기입한다. 브레인스토밍은 여러 사람이 모여하는 회의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하나의 이야기를 구축하는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방법이다. 위 '깊고 넓게 알아보다'에서 이해한 수준만큼 이슈 트리의 가지는 뻗어나갈 것이다. 물론, 마인드 맵의 가지가 무성해야 제대로 생각한 것은 아니다. 기준은, 마인드 맵에
1) 사실을 이해하고 있는가?
2) 그 사실에 얼마나 익숙한가?
3) 사실의 이해와 익숙함을 통해 내 생각이 형성됐나?
가 적혀있는가 이다.
내식대로 그 이슈의 속내를 들여다보았다면, 내 향기가 나는 글을 쓸 수 있다. 내 향기가 제대로 담긴 글은 거창하고 엄청난 글이다. 사실을 관찰하고 전한다는 다큐멘터리도 화자가 그 사건에 대해 넓고 깊게 알고 깊고 넓게 생각하지 않으면 속보와 다름없다. 단지, 동물의 행태를 카메라에 담아 편집해 내보이는 것일 뿐이다.
베스트셀러에 이어 밀리언 셀러 같이 돈을 기대한 청자라면 이 이야기가 탐탁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독자'란 나의 생각에 공감, 동의, 좋아하는 이들이 많다는 의미다. 이것은 직선적 진행 관계다. 다시 말해서, 수많은 독자가 나의 생각에 공감, 동의, 좋아하도록 이야기를 구축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는 말이다. 생각하고 생각해서 주제나 사건에 대해 농익은 생각을 내놓을 때 나올 수 있는 결과 중 하나이다. 간혹 히트작을 분석해서 공통된 성공요소를 도출하고, 그것을 프레임으로 세워 채워나가듯 이야기를 쓰는 경우를 생각해 봤다. 물론, 이 경우에도 주제나 사건에 대해 충분히 익숙해져야 제대로 채운다. 프레임에 대해 그 맥을 잡고 있어야 성공적으로 이야기를 조합해 낼 수 있다. 화자는 그렇게 생각한다.
여기까지 생각을 해보니 나 역시 거창하고 엄청난 이야기를 쓸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능성의 끝자락을 보았다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내가 익숙한 것은 무엇인가? 집밥 하기? 살림? 회사생활? 내 직업의 지식? 무엇일까? 눈 감고도 설명할 수 있는 주제나 사건은 무엇인가? 이것을 먼저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는 것이 시작은 아닐까? 내가 쓰려는 것이 정보를 담은 글이고, 그에 관해 책을 쓰려고 한다면, 그 정보에 대해 누구보다 익숙해져야 한다. 1부터 10까지 모든 사실을 알 필요는 없다. 1~10 사이 하나 만이라도 익숙하고 농익게 생각을 했다면 그에 관해 작성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거창하고 엄청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예전에 누군가 이 주제나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구축했더라도 내 향기가 담긴 이야기가 구축되지 않을까? 포도의 품종은 같아도 떼루아가 다르고 재배의 정성이 다르면, 다른 명품의 와인이 나오는 것처럼.
#이야기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