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성한 Dec 31. 2019

시간표를 지키세요

호주 멜번에 사는 한 버스기사의 삶 이야기

성탄절 이후부터 해를 넘겨 1월 26일인 호주건국 기념일까지는 호주 최대의 휴가기간이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정규직 가운데 대부분이 1년에 4주의 휴가가 보장되는데, 절묘하게도 그 기간이 맞아떨어진다. 덕분에 도시는 무엇도 모르는 관광객들과 휴가를 떠나지 못하는 '처량한' 사람들만 보일뿐, 텅 비어있다. 물론, 대형 쇼핑센터 주변은 복싱데이부터 그 주의 주말까지는 수많은 쇼핑객들로 넘쳐난다. 휴가도 못 가는 판국에 이렇게라도 위로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아까 그 처량한 사람들 중에는 나와 같은 버스기사들도 포함된다. 미리 휴가를 신청한 고참들이야 다른 사람들과 같은 시기에 휴가를 떠나는 호사를 누리지만, 나 같은 신참은 텅 빈 도시를 텅 빈 버스로 채워주어야 한다. 만원 버스는 고사하고 손님 열명 태우는 것이 흔치 않은 상황이다. 열명 넘게 태운다 하여도, 장담컨대 절반은 한 가족 승객일 가능성이 크다. 어디 시골에서 놀러 와 여기저기 다녀보는 그런 상황일 것이다. 손님이 적다는 것에 불만은 없다. 되려 손잡이를 잡고 서있는 손님이 없으니 안전사고 위험도 적고, 여러모로 좋긴 하다만,


문제는 스케줄을 지키는 것이 상당히 어렵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그런지 모르지만, 멜번의 버스는 자신의 시간표를 가지고 운행이 된다. 몇 번 노선이냐에 따라, 하루 중 어느 때냐에 따라 앞 뒤차 간 가격이 존재하고, 그 간격에 맞춰서 운행되어야만 한다. 이 시간표는 휴가기간이라도 특별히 더 촘촘하게 운영된다는 가 하는 신축성은 전혀 없다. 그러다 보니, 버스기사들마다 제 시간을 맞추기 위하여 거북이보다 약간 더 빠른 속도로 버스를 운행한다. 그래도 체크포인트에 일찍 도착하여, 출발시간까지 비상등을 켜 두고 멍하게 서있기 일수다. 관제실에서는 수시로 무전을 친다. 휴가기간이고 교통량이 없으니 더더욱 안전하게 운행하라고 안내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는 '현재 관제실에서는 시간표대로의 운행을 가장 중점적으로 모니터링을 하고 있다.'며 약간은 다른 내용을 전한다. 누군가 일찍 움직였다가 찍힌 것이다.


좀 노련한 기사들은 버스가 서서 대기할 만한 곳을 잘 알고 있다. 다른 노선들과 공유하는 정류장은 괜히 서있다가 욕먹기 일수이니, 나름의 '조용한' 정류장을 찾아 아예 가 여유를 즐긴다. 하지만 신참들은 딱 그 체크포인트(일반적으로 많은 노선들이 겹친다.)에서 대기하다가 뒤차의 빵빵거림과 손가락질을 받기 일수이다. 더군다나 승객의 따가운 눈총을 버텨낼 만큼 피부가 두꺼워져있지 않으니 다 고역이다. 아예 처음 출발지부터 늦게 출발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런 방법을 잘 못 사용하다가 승객의 불만 사항이 접수되면 참으로 난감하기에 조심해서 써야 할 방법이다.


나는 며칠 전부터 모든 정류장 정차 작전을 가동 중이다. 승객이 있거나 말거나 무조건 다 서버리는 것이다. 평소에는 승객이 손을 들거나 신호를 주지 않으면 그냥 휙 지나가버렸지만, 이제는 강아지라도 한 마리 보이면 차를 세우고, 풀잎이 흔들여도 차를 세우고, 혹 정류장에 약간 큰 쓰레기라도 보이면 세우고 정리를 한다. 혹 승객이 타면 천천히 문을 열고, 편히 오를 수 있도록 최대한 버스를 낮춰주고, 앉을 때까지 아주 친절하게 기다렸다가, 앉는 것을 보고 천천히 버스를 들어 올리고 문을 닫고 출발한다. 신호등의 초록불보다는 빨간불에 내 타이밍을 맞춰서 가급적 모든 신호등에서 여유를 부린다. 혹 승객이 교통카드 충전을 원하면 천천히 돈을 받고 천천히 돈가방에 넣으며, 평소에는 가져가거나 말거나 하던 영수증도 꼭 챙겨준다.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좀 한적한 정류장에서 잘 보이는 사이드미러의 각도를 재조정한다. 수동으로 조정을 해야 하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캐빈 문을 열었다가, 나가서 조정하고, 다시 들어와 앉아서 확인하고... 이 과정을 세 번 정도 하면 30초는 그냥 지나간다.


회사에서는 늘 이야기한다. 늦는 것은 문제 삼지 않지만 일찍 정류장을 떠나서 시간표시간 맞춰 나온 승객이 발생하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단다. 누군가의 삶에서도 아주 작은 부분일지도 모를 버스시간표를 꼭 지켜줘야 할 의무를 강조해준 것이다. 오늘은 2019년의 마지막 날. 오늘 오후 운행에서 최소한 10명의 승객에게 Happy New Year라고 인사하는 것이 목표인데, 달성이 가능할지 모를 일이다. 글 읽어준 몇몇 분들, 새해 복 많으 받으시길...

작가의 이전글 패션도시 멜번의 날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