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아버지 편지를 읽기는 하는 거니?
오늘은 아버지가 너희에게 사과를 좀 해야겠다.
사실 우리들에게 어려움이 생겼을 때(무슨 일인지 알게야) 아버지는 너희들만을 위해 산다고 다짐했지.
그건 할머님 영향이 컸어.
그래서 아버지는 어린 너희를 데리고 캐나다에 간 거야.
그런데 사실은 너희가 어느 정도 크고 기숙학교에 갈 수 있으면 너희들 기숙학교에 넣고 아버지는 세상을 돌아다니려 했단다.
솔직히 말해 너희는 아버지가 살아가는 이유였지만, 다른 한편 가장 버거운 짐이었어.
가끔 너희만 없었다면... 이런 마음.
미안하다.
그게 아빠였어.
우리나라에서 잘 나가는 정혜신이란 정신과 의사가 있단다.
그분이 언어 분석학자의 말을 빌어 사람이 최고의 유쾌한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 “홀가분”이라고 소개하더라.
우리나라 사람들의 감정 단어는 약 430개 정도 된다는구나.
그중 불쾌와 유쾌를 표현하는 단어의 비율이 7;3 이란다.
정말 그럴까 싶지만 오늘 아버지가 너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 우리의 언어습관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런 삶을 거부하지 못하는 우리의 사고를 말하고자 함이다.
아들아
언어란 우리의 생각을 내재화하는 힘이 있단다.
쉽게 말해 나의 생각은 나의 언어습관으로 내 속에 깊게 자리한다고 할 수 있지.
즉 어떤 언어를 쓰느냐에 따라 생각이 만들어지고, 그 생각에 따라 행동하는 거지.
그런데 언어는 사물이나 사건의 일부만 표현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거든. 그리고 그에 따라오는 그 생각이란 것은 완벽할 수 없겠지.
결국 내 삶의 일부, 즉 편견을 나타낼 뿐이야.
그렇다면 말이다.
네가 “홀가분”이란 단어를 네 삶에 체화하려면 말이다.
네 삶 자체가 홀가분해야 한단다.
경쟁하지 말거라, 홀가분한 것이 아니라 긴장의 연속이란다.
사과할 것 있으면 사과하거라.
굳이 비켜가려다 보면 너만 버거울 뿐이다.
가지고 싶은 것에 집착하지 말거라 되려 가지고 싶은 것이 너를 편견에 사로잡히게 할 뿐이다.
굳이 이루려고 너를 속박하지 마라.
이룸은 그 너머의 또 다른 산을 볼 뿐이다.
그러다 보면 그것을 또 이뤄야 할 것 같은 신기루에 쌓일 뿐이다.
사과하거라.
미워하지 말거라.
용서하거라.
내려놓거라.
뛰지 말고 걷거라 산천초목이 나를 만짐을 느끼거라.
세상 가치에 휘둘리지 말거라.
책임질 일에 가능한 가까이하지도 말고 만들지 말거라.
이 모든 것이 홀가분하게 사는데 걸림돌이다.
아버지는 홀가분하게 살지 못했다.
아버지는 뭔가를 도모하기 위해 늘 조직을 만들고, 사건을 만들고, 그 사건을 아버지 뜻으로 끌어들이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그건 바로 명예욕이었음을 그때는 몰랐단다.
홀가분하기보다는 항상 긴장하고 그 긴장 속에서 살아있음을 느끼며 살았지.
너희들 앞에 부끄럽지 않으려고 남자로서 살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살았다.
책임감만 아버지 삶을 꽉 채웠단다.
아버지처럼 살지 말거라.
아들을 위한 거라면 모든 부끄러움도 들어낼 수 있는 아버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