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아버지가 늙나?
왜 이리 아들들이 보고 싶지?
헐~ 천하에 아버지도 이제 늙나 보다.
아버지가 지금 나 자신을 "천하의..."라고 표현했다.
이런 아버지의 표현이 심해지면 정신병으로 말하면 '자기애적 성격장애'라 하고, 그냥 일상적으로 말하면 '자기 잘난 맛'에 산다고 하지.
간단히 말해 좀 꼴불견이지 ^^
그런데 말이다 아들
인간은 신비한 존재란다.
이제까지 모더니즘(modernism)적 인간관에서는 인간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알아가려고 했어.
혹은 기질적으로 MBTI니 뭐니 하면서 성격유형을 찾아서 '나는 어떤 사람이야'라는 식이었지.
그러나 인간에 대해 이제는 다시 생각하려는 경향이 인간학에서 이루어지고 있단다.
그 변화 중 하나가 인간은 신비한 존재, 즉 인생 자체가 신비에 싸여 있는 것이야.
이 또한 철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너 그 정도를 이해할 수준 아니잖아? 흐흐흐 아버지가 너 막 개 무시한다 지금 ^^
필 주커먼이란 박사가 인간과 종교에 대해 말하면서 ‘“적응적 환상”이란 말을 썼단다.
종교가 생긴 이유를 주커먼 박사는 이렇게 말하지.
인간이 대 자연의 엄청난 풍부함을 누리기도 하고, 또 때론 위력 앞에서 두려움과 공포를 겪으면서 살았다.
그러다 보니 자꾸 뭔가 환상을 갖는다는 거야.
그것이 신적 존재를 환상으로 만든 거지. 어렵게 말해 신은 사유의 과정과 결과물이고, 종교는 그 사유를 제도적으로 만든 것이란 거야.
오해하지 마 이 분이 말하는 것 역시 사실이 아니라 자신의 논리니까.
뜬금없이 왜 이런 말을 하냐면 말이다.
세상을 살아갈 때, 뭔가는 자기가 붙잡고 가는 것이 있어야 해.
이데올로기가 되었든, 꿈이 되었든, 어떤 인생의 목표가 되었든, 사랑타령을 하든. 이런 모든 것에는 자신만의 생산물이 있어.
그 생산물을 만들어 과정에서 혹은 결과치를 보고 만족해하고 기뻐하지.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준이야. 사람은 기준을 정하지 않고 살 수 없는 존재야.
어떤 형식으로든 기준을 정하지.
그리고 그 기준에 의해 웃고 울어. 마치 주커먼 박사가 말한 신적 존재를 만든 것처럼. 우리의 행동, 선택, 고민을 할 때 자기만의 기준을 정해야 해.
문제는 이 기준을 다른 사람에게 맞혀서 생각하는 거야.
저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저 사람에게 잘 보일 수 있을까?
저 사람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까?
아버지가 상담을 가르치고, 상담을 하고 있잖니.
아주 미치겠다. 엄청 많은 사람이 저런 생각으로 기준을 정하고 힘들어하고, 기뻐해.
누가 인정해 주면 헬렐레.. 누가 좀 무시한 것 같으면 흑흑흑...
반면 또 너무 자기만족에 빠진 사람이 있어.
이건 뭐 거의 자기애적 성격장애 수준이야.
아버지? 후자에 가깝기는 하지만 후자도 전자도 아니야.
후자가 되었든 전자가 되었든 누가 더 옳고 그르다고 할 수 없어.
어차피 모든 것은 주관적인 거야. 즉 자신만의 삶의 방식이니까.
그러나 후자든 전자든 ‘원래’ 그런 것이 아니야. 누군가에게, 혹은 어느 환경에서, 혹은 자기 필요에 따라 영향을 받고, 생활화된 것뿐이야.
이것을 아버지는 저 주커먼 박사의 적응적 환상이란 것에 대입시켜 생각해 보고 싶다.
구강기 항문기의 행위, 심지어 자신의 생산물이 똥이 되었든 간에 자기만족에 살던 인간이 점점 부모에 의해, 사회화를 통해, 관계 속에서 자신의 생산물에 대한 잣대를 부여받고, 그 잣대를 통해 자신의 기쁨과 좌절까지 적응되어 가는 거지.
그 판단, 평가, 인정을 자신의 것으로 환상하는 거지. 신이 둔갑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본다.
아들아 간단히 말해 인간은 어느 쪽이 되었든 환상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왕 환상 속에 살려면 자신만이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신비한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그 신비한 존재가 만들어낸 결과물은 항상 신비한 거야.
그러기에 자신의 결과물에 적응하는 환상을 가져라.
적응적 환상이란 자기만족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생산물을 만들어 가면서.. 혹은 결과를 보면서 환상하는 거야. 타인의 인정, 판단, 평가의 환상이 아니라 나만의 환상.
타인에 의해 너 자신이 채워질 이유가 없지.
그 또한 환상이지.
단지 너 자신에게 적응해 가면 되는 거야. 인류는 ‘나는 누군가?’를 가지고 사유를 발전시켜 왔어.
그럴 필요 전혀 없다.
어제 알았던 나, 오늘 또 발견한 나,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나에게 적응해 가며, 그 적응 속에서 자신에 대해, 자신의 창작물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즐기며 살면 돼.
아버지가 그 쓰디쓴 커피를 좋아하게 된 이유가 있단다.
아버지 어릴 때, 블랙커피를 마시면 세련된 사람인 것 같은 환상이 있었어. 그거 유행이었거든.
그래서 억지로 딸꾹질을 참아가며 폼 잡았지.
그게 한 30년 전쯤일 게야.
그때 그 엉뚱 발랄(?)한 아버지를 생각해 봐라.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우스웠을 게야.
그래도 아버지는 혼자 폼 잡으며 얼마나 즐거워했겠니... 그런데 지금은 진짜로 블랙커피가 좋아.
적응하는데 30년 걸렸어. ^^
또 너도 알다시피 아버지는 아침마다 녹차를 머그잔으로 두 잔 정도 가득 마시잖니.
사실 어릴 때 그것도 폼 잡다가 그런 거야 블랙 커피 바람이 그치고 녹차 바람이 불었어.
녹차를 마시는 사람은 마치 뭔가 깊은 사색을 하는 사람 같은 환상.
그러니 아버지가 또 폼생폼사 아니더냐.
야~ 녹차 처음 마실 때는 떨떠름한 데다 뭐 마치 고목나무 삶아 놓은 국물 같더구나.
그런데 지금은 그게 입 안에 머무르고 있을 그 느낌이 참 좋아.
적응되어 간 거지. 30년 동안 꾸준하게.. 허~ 별 걸 꾸준히 하는 아버지지?
아들
사람이 타인의 눈을 무시하고 살기가 매우 어려워.
그러니 굳이 주체적으로 살려고 발버둥 칠일 아니야. 네가 신이 아니잖아.
그렇다고 자신만의 눈으로 사는 주체적 삶을 포기할 이유도 없지.
중요한 것은 적응되어 가는 거야.
그런데 적응적 삶으로 자신을 내 맡기기에는 뭔가 섭섭하잖아.
그러니 자신의 환상을 즐기고, 그 속에서 만족을 체화해야지.
기억해라.
하늘 위에도 눈이 있다.
환상에 젖어 아들을 보는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