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며, 이야기대로 살고 있는 중이다.
우리의 지난 이야기는 우리에게 다소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이야기를 만들며 살고 있다.
이야기는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조정하고 통제한다.
우리의 생각이 우리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우리를 좌지우지한다.
감정과 행동, 생각을
들었다 놨다 한다.
우리는
자신의 이야기대로 살아간다.
바닷가
시원한 바람이 분다.
눌러쓴 모자가 벗겨지지 않을 정도로 바람이 분다.
바다 쪽으로 길게 누워 있는 구멍 숭숭 현무암 따라 걷는다.
기분 최고다.
눈이 부셔 감히 바라볼 수 없는 태양이 춤춘다.
구름 사이로 들고 나며 춤춘다.
라이브 가수 파도의 목소리는 날것의 들뜸을 품어낸다.
지그시 눈을 감고 이 둘의 가무를 감상하는 현무암은 다크그레이 옷을 입고 있다.
의상 탓일까 제법 진중하고 위엄 있게 보인다.
진중하고 위엄 있다니…….
구멍 숭숭 뚫린 현무암일 뿐인걸.
한 후배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선배는 빈틈없어 보여 그런데 알고 보면 허당이야 허당 하하” 그 말이 시원하게 느껴진다.
세상 허당인 게 한 둘인가.
불쑥 아버지 생각이 들어온다.
그분이 그렇게 좋아하던 바다이다.
나도 바다를 좋아한다.
그분은 커다란 개를 좋아했다.
나도 커다란 개를 좋아한다.
그분은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참 많았다.
나도 가끔은 번뜩일 수 있는 아이디어가 있다.
그분은 독립적이었다.
나도 독립적이다.
그분은 실행에 주저함이 없었다.
나도 실행에 주저함이 없다.
그분은 허당이길 거부했었다.
아니 허당을 무시했었다.
나는 허당임을 받아들였다.
허당임이 오히려 속 시원했다.
우리 둘의 차이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아닌 삶이 아니라고 고독해했다.
구멍 숭숭 현무암의 구멍처럼 비어있는 삶의 구멍을 못 견디게 힘들어했다.
그래서 삶을 정리하는 시간도 자신이 정했다.
한때는 나도 그러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다 이야기를 다시 쓰기로 했다.
이유가 있다.
내 아버지의 이야기를 나는 다시 써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아버지가 두 분 계신다.
한 분의 아버지는 사업에 크게 실패한 후에 주님을 모시고 살았었다.
소주, 맥주, 양주. 그런 아버지 덕에 어머니는 진정한 트랜스포머가 되었다.
가정주부, 식당주인, 계주로 변신에 변신을 더하며 강해져 아니 아니 독해져 갔다.
아버지가 알코올과 만나 한 몸을 이루는 날.
내가 기대하던 아버지 모습이 아니어서 처절하게 우울했다.
아니 집안에 우울한 분위기가 온통 무겁게 나를 짓누르기에 우울했다.
무책임, 무능력, 무기력. 아버지는 오랜 세월 그리 사셨다.
부부간의 관계, 자식 교육, 가정 경제, 심지어 자신의 건강과 자존감도 내팽개쳤다.
그분으로 인해 내 삶은 경제적 궁핍을 겪었다.
우울한 정서는 방석처럼 깔고 앉았다.
어른, 흔히 말하는 권위자에 대한 불신도 만만치 않았다.
삶이 암흑이었다.
나에게는 또 다른 아버지가 있다.
그분은 내게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다.
다른 사람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살면 그저 그렇게 밖에는 살지 못한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이 원숭이 똥구멍은 빨개!라고 하면 왜 꼭 빨강이지?라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표현이 우스워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이 말씀은 모두가 당연하다고 하는 것에 의문을 가지고 살라는 뜻이었다.
이 말씀에 영향받은 나는 늘 보편적이지 않은 사고를 발동시켰다.
덕분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이상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종종 들었다.
가끔 나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표현해 주는 이들은 독특한 생각을 한다고도 했다.
그분이 늘 말씀하신 주체적 삶은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자유를 주었다.
당연함에 대한 거부는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행동으로 보여주신 실행력은 미지의 세계를 두려움이 아닌 기대감으로 만날 수 있었다.
기분 좋은 용기였다.
두 이야기의 주인공은 한 분이신 내 아버지 이야기다.
아버지는 한 분인데 이야기는 두 개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진실인가?
둘 다. 다른 것이 있다면 앞의 이야기는 내가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나갈 때 그 어려움을 드러내기 위해 채택한 이야기였다.
뒤의 이야기는 지금의 내가 채택한 이야기이다. 내가 지금 누구이며 어떤 자리에 있으며 어떤 삶을 사느냐 즉, 현재의 내가 누구냐에 따라 채택하는 이야기가 다르다. 아버지는 아버지 그 자체였다.
그 아버지에 대한 나의 해석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년의 내가 다시 쓴 아버지에 관한 내러티브다.
이야기는 다시 쓸 수 있다.
이야기를 다시 쓰는 것은 남는 시간에 헛짓하는 것이 아니다.
미래를 향한 징검다리이다.
경험하는 현재에 기대하는 현재를 덧입혀 보는 것이다.
다시 쓰기를 통해 미래의 가능성을 염탐하고 만만하면 행동으로 옮겨보고 아니다 싶으면 또다시 쓰기를 하면 된다.
이는 마치 광산에서 금을 캐는 것과도 같다.
지금 여기에서 다시 쓰기를 통해 그동안 보지 못했던 부분, 소홀히 여겼던 부분을 보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고 아쉬운 부분을 건져내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다음 단계로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선택을 하게 되고 각오를 다지기도 한다.
이야기는 우리의 행동양식을 지시하기도 하고 세상을 보는 안경 구실을 하는 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시 쓰기를 해야 할까?
먼저, 당연했던 것들 그리고 익숙했던 것 -사실이라고 명명했던 것들- 에 대해 의문을 품어보는 것이다.
왜 꼭 그래야 하지? 꼭 지금이어야 하나? 누구의 이야기인가? 여기에 답해보기 위해 ‘사실’을 뒤집어보고 엎어보는 것이다.
즉 이면을 보는 것이다.
중요한 포인트는 다시 쓰기의 시점이다.
결론은 다시 쓰기 시점은 현재의 원함에서 시작한다.
지금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다시 쓰고 싶은지를 자신에게 묻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