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가 몇이었더라? 드라마에서처럼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이 아니라면 누가 물어보면 바로 대답을 해야 겠기에 갑자기 내 나이를 머리 속으로 혼자 계산해보았다. 평소 내 나이라는 것을 거의 의식하지 않고 살다 보니 나는 가끔 내 나이가 몇이었는지 헷갈린다.
그러나 계산은 너무 쉽게 끝난다. 암산으로도 몇 초면 금방 답이 나온다. 거기에 한살을 살포시 더하면 한국인으로서의 나의 나이가 명백히 나오는 것이다.
아..그런데 너무 생소한 숫자이다. 너무 오랫동안 나이를 잊고 살았나 보다.
고등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내 하루의 대부분을 함께 보내는 사람들의 나이가 고작 17~19살 사이인 것이다. 물론 교무실에 있으면 선생님들이 계시고 그분들의 나이는 20대 중후반부터 60대 초반까지 매우 다양하다. 그 중 인생을 80세까지로 보아 반평생 가까이 살아온 나의 나이는 아직 평균 정도일 뿐이다. 아직도 나이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고 예의를 다해 모셔야 할 분들이 내 위로 다수 계시는 것이다. 이렇게 나이대의 차이가 매우 크니 어느 사회나 비슷하겠지만 교사들은 끼리끼리 비슷한 나이또래의 사람들과 무리를 짓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 나이란 상하의 관계를 정해주므로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과 함께 있으면 그들과 동등관계가 아니므로 당연히 마음은 조금 불편해진다.
한국 사람들은 나이에 매우 민감하다. 처음 만나면 당연스럽게 나이를 묻고 상대편이 나보다 많은지 적은지 서열을 정한다. 나이에 따라 호칭도 달라지고 동갑을 만나면 의외로 쉽게 친구도 될 수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그러나 나이를 밝히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다. 십대가 아니고서야 나이를 밝힌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해마다 상당한 부담감이 가중되는 일이 아닐까?
심지어 고등학생들도 나이를 종종 물어본다. 대충 얼렁뚱땅 얼버무릴 수밖에 없다. 십대의 아이들이 실제 내 나이를 듣고 입을 떡 벌리고 놀라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나도 알고 있다. 십대에는 서른이라는 나이가 까마득히 멀고 그 나이가 되면 이미 모든 일을 다 이룰 만큼 매우 늙었을 거라고 예상했었다는 것을… 해마다 아이들은 집요하게 나이를 물어보았지만 그저 아이들이 상상하는 대로 맡겨두었다. 서른 초, 중, 후반 그들이 나름의 판단기준으로 내 나이는 정해진다. 실제 나이보다는 어리니 은근히 마음속으로 씨익 회심의 웃음을 지을 만큼 흐믓해지기도 하고 만족스럽다. 어느 나이라도 상관없으니 보이는 대로 당신의 추측대로 생각하시라.
외국인과 한국인이 섞여있는 모임에 자주 참석하는 편이다. 영어예배라는 곳을 다니고 있으니 그곳의 구성원은 한국인, 교포, 다국적의 외국인 들이 골고루 섞여있다. 그들과 만나 모임을 가질 때면 외국인들은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도 나이라는 것을 묻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나이가 적든지 많든지 모두 섞여 앉아 그야말로 ‘free talking', 자유로운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누군가의 ‘언니’나 ‘선배’나 ‘연장자’가 되지 않아도 되니 마음은 가볍고 서로 대화만 잘 소통이 된다면 나이가 얼마나 차이가 나든 누구와도 그저 ‘친구’라는 매우 편안하고도 친근한 관계를 만들 수 있다.
안면이 있는 외국인 친구들은 만나면 나의 이름을 부를 뿐이다. 나를 언니, 선생님, 아주머니, 혹은 어머님 이라는 호칭으로 부르지 않는다. 때로 길거리에서나 상점에서 물건을 파시는 아주머니들이 나에게 ‘아주머니’ 라거나 간혹 ‘어머님’ 이라고 부르면 적잖이 당황스럽다. 예를 들어, 얼마 전 아파트 앞을 나와서 도서관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기다리고 있는 데 신문구독을 홍보하시는 어느 여자 분이 자꾸만 집요하게 신문구독을 권하셨다. “인터넷 뉴스만 검색할 뿐 평소에도 종이로 된 신문은 잘 읽지 않는다.” 매우 조심스럽고 겸손하게 말씀드렸으나 그분은 막무가내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는데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셨다.
“아주머니, 신문 구독하세요. 무료로 일 년 넣어드려요. 집에 아이들도 신문 읽게 하면 좋잖아요.”
결혼을 했으니 ‘아주머니’ 인 것은 맞지만 아이가 없으니 아직 누군가의 ‘어머니’는 아니다. 물론 그들이 보기에 결혼을 하고 충분히 신문을 읽을 만한 아이도 있을 나이인 것 같으니 그리 부르는 것이 큰 잘못은 아니겠지만 한사코 어려 보이고자 하고 ‘아주머니’라는 호칭을 썩 좋아하지 않는 자로서는 때때로 아쉬운 마음이 든다. 왜 우리나라의 언어에는 ‘Mr.’ 나 ‘Ms.’ 혹은 ‘lady’ 같은 모든 나이 대를 구분하지 않고 아우르는 호칭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처음 보는 나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낯선 이를 길에서 부를 때는 영어의 ‘Excuse me’ 처럼 그저 나이를 가늠하지 않는 ‘저기요’ 정도로 통칭해주면 안될까?
나이를 자각하는 것은 그 나이대로 살도록 강제하는 힘이 있는 것 같다. 그러니 가능한 한 젊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노화를 방지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그저 나이라는 것을 인생 대부분의 시간동안 잊고 사는 것이다. 나보다 스무 살은 어린 젊은이들과 어울려 대화를 나눠보라. 물론 스무 살 정도 어린 이들과는 상당히 세대차이라는 것이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젊은 사람들은 그 세대에서 습득한 상당히 새롭고 재미있고 통통 튀는 아이디어와 개성이 있다. 그들에게 어른이나 선배 대접만 강요하지 않으면 그들도 우리를 한 동등한 인간이자 친구로 대우해준다.
심지어 십대 아이들과도 내 나이를 잊어버리고 매우 잘 노는 편이다. 수업을 하고 나서 때로 소소한 대화를 나눌 때면 이들과의 시간이 너무나 즐겁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간혹 십대들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몇몇 신조어들과 심각한 욕설을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십대의 아이들이란 늘 유머나 재치가 넘치고 지나치게 진지하지 않으며 항상 ‘재미’를 추구하는 이들이다. 그 아이들의 기상천외한 이야기를 들으며 아무 근심 없이 박장대소 해보라. 삶이 한층 행복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십대의 여학생들은 길바닥에 나뭇잎만 굴러가도 웃는다.’ 라는 말이 있다. 사실 가끔은 그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서 그들끼리 대화를 나누다가 왜 바닥에 구를 것처럼 웃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함께 따라서 웃고 싶어질 것이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그 이유를 묻고 들어보아도 도무지 공감이 가지 않아서 함께 웃을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슬프게도 나이가 들수록 웃음이 적어지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아이들은 세상 근심이 없는 것처럼 진정 깔깔거리며 얼굴이 새빨게 지도록 한껏 즐겁게 웃는다. 웃으면 복이 온다고 하지 않는가. 웃는 얼굴은 어느 나이대의 사람이라도 한층 어리고 매력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무리 주장한다 한들 한국의 전통적인 문화라는 것이 있으니 여전히 낯선이들에게 ‘아줌마’ 나 간혹 ‘어머님’ 이나 좀 더 나중에는 ‘할머님’ 이라는 호칭을 들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십 년은 어린 마음으로 살아가며 어느 나이대의 사람이라도 나를 친구에게처럼 무슨 이야기라도 허심탄회하게 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
어느 나이대의 사람들과도 즐겁게 어울려 아이 같은 마음으로 심플하게 살아가리라.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반짝이면서 세상 근심 걱정 없는 것처럼 깔깔 웃어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