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음의 행복이랄까
며칠 동안의 잿빛 우울한 날들이 지나갔다.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고 하루에도 서너 번씩 눈물을 흘리며 보낸 이틀의 시간. 또 아무렇지도 않게 마음에 봄이 스며들었다. 실컷 울고 나면 비가 그치듯 마음에도 햇살이 내리는가 보다. 뿌연 미세먼지가 지나가고 파아란 얼굴을 드러낸 하늘에 눈부신 햇살이 비추인다. 오후에 산책길에 나섰다. 봄은 마치 꿈결 같다. 햇살에 말갛게 씻긴 나무와 꽃들이 파스텔 톤의 아련한 빛깔을 띠고 있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마른 가지만 보이던 벚꽃이 하루 밤새에 한꺼번에 피었다. 한 무리의 유치원 아이들이 하얗게 웃으며 와 하고 달려와 안기는 것 같다. 한적한 동네 길을 산책 하기만 해도 행복하겠지만 버스를 타고 조금 나가 보기로 하였다. 한낮의 버스는 텅 비어 있어서 강렬한 직사광선을 피해 느릿느릿 뒷좌석으로 다가갔다. 갑자기 급 출발을 하는 바람에 버스 기둥에 쿵 부딪치고야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창밖에는 가지각색 꽃들이 저마다 제 아름다움을 뽐내는 데 기사 아저씨는 그다지 즐거워보이지 않는다. 정거장에 멈출 때마다 앞 뒤로 파도처럼 출렁이는 버스. 내리려고 기다리는 손님들도 이리저리 부딪치다가 기사 아저씨를 흘깃 쳐다본다. 무슨 일인지 심통이 난 아저씨가 거친 운전으로 화풀이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머~ 어느 날은 세상 모든 일에 화가 나기도 하겠지.
하교 길에 오른 중학교 여학생들이 버스의 맨 뒷자리에서 조잘조잘 수다를 떤다. 다소 거친 단어들이 오가고 사이 사이 킥킥거리며 웃는 학생들. 익숙한 풍경과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본다. 버스의 타이어에서 고무 타는 냄새가 나서 창문을 열어라 닫아라 하며 옥신각신 하나보다. 교복을 입고 하교를 하는 학생들을 보면 왈칵 그리움이 올라오기도 한다. 그러나 곧 머리를 흔들고 흐드러지게 핀 봄 꽃으로 눈을 돌렸다.
몇 정거장을 지나 버스에서 내렸다. 둥그런 산을 배경으로 작은 물이 흐르고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풍경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가까운 동네 산책이건만 카메라를 굳이 챙겨왔다. 아마추어라도 카메라를 들고 나오면 세상 만물을 좀 더 가까이에서 들여다 보게 된다. 카메라 프레임에 들어오는 사물을 자세히 들여다 보고 당겨보고 하며 새삼 정이 든다. 셔터를 누를 때 찰칵 하는 경쾌한 소리와 검지 손가락에 파르르 느껴지는 감각이 썩 마음에 들기도 하고.
벚꽃 길 사이를 걸어보았다. 조그만 물길은 하늘을 닮아 푸르디 푸르고 버드나무며 잔디는 온통 연두빛 여린 새싹이 돋아나고 있다. 겨울 바람에 죽은 듯 잠을 자던 세상 만물이 모두 깨어나 솟아오른다. 세상 처음 맞이하는 찬란한 봄이다. 담장에 피어난 노란 개나리와 벚꽃이 주인공이지만 벚꽃 나무 아래 키 작은 풀꽃도 어여쁘기만 하다. 벚꽃 만한 화려한 미모는 아닐지라도 텃밭을 매는 시골 아낙네 같은 수수한 멋이 있다. 잔디밭 속에서 뾰족하게 고개를 내미는 보랏빛 제비꽃도 저를 보아 달라 살며시 말을 건다. 아스팔트 보도 블록 틈새를 비집고 우뚝 솟아 피어나는 노란 민들레에게는 칭찬을 해주고 싶다. 그 좁디 좁은 공간에서도 제 몫을 다하여 저리도 예쁘게 피어나다니 장하지 않은가
목련은 단연코 우아하다. 흰 드레스를 차려 입은 중년의 기품 있는 여인 같다. 주름진 눈가에 세상을 살아온 지혜와 여유가 묻어나는 따뜻한 미소를 지닌 여인. 온통 벚꽃 잔치에 보랏빛 겉옷에 흰 속살을 가진 자색 목련을 보고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발길을 돌려 자색 목련을 한참 바라보고 감탄을 연발하니 지나가던 다른 여인도 와서 사진을 찍느라 바쁘다. 그녀도 자색 목련과 오붓한 시간을 갖도록 조용히 자리를 내어주었다.
벤치에 앉아 잠시 쉬었다. 눈 앞에 펼쳐진 네모난 프레임 안에 사람들이 오고 간다. 유모차를 밀고 가는 어머니와 아기, 썬 캡을 쓰고 바지런히 걷는 아주머니, 운동복을 차려 입고 뛰는 청년,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걷는 연인,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친구들, 정장을 차려 입고 퇴근길을 걷는 사람들… 파릇파릇한 봄 길을 걷는 그들이 모두 한 폭의 그림에 들어왔다 나간다. 저마다 다른 삶을 살고 있겠지만 부디 그 길에서는 한껏 행복하기를… 똑같이 공평하게 주어진 하늘과 햇살과 꽃들의 값없는 축복을 받고 있으니.
꽃 구경에 취하여 두 시간의 산책이 훌쩍 지나갔다. 봐도 봐도 행복한 꽃 무더기.
오늘 하루 행복한 이유는 봄과 함께 살아 숨쉴 수 있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