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이사를 하고 옛날 편지가 가득 든 박스를 발견했다. 놀랍게도 중학교 시절부터 대학 졸업 무렵까지 지인, 친구, 연인 등과 주고받은 편지들이었다. 이전 집으로 독립하여 이사를 한 이후 거의 십년이 넘는 시간동안 이 편지 박스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것이다.
사뭇 감성에 젖어박스를 열어서 옛 편지들을 하나하나 읽어보았다. 대부분이 어린 시절 함께 교회에 다니던 친구나 오빠, 선생님들께 받은 편지들이었다. 예쁜 편지지에 손으로 꾹꾹 눌러쓴 손 편지라니 이젠 그 편지를 쓰던 시간이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인터넷과 핸드폰이 없던 시절에 우리는 손으로 편지를 썼던 것이다?
아마도 그 시절에는(정확히 말하면 80년대 후반~90년대 중반, 아~내 나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데 어쩔 수가 없구나) 편지를 쓰는 게 어느 사이에서나 아주 자연스러운 의사소통 수단이었던 것 같다. 그저 교회 오빠, 친구 사이였는데도 몇 개월에 걸쳐서 편지를 여러 통 주고 받았으니 말이다. 처음 만나서 반갑다는 이야기, 수능 시험 잘 보라는 이야기, 어떤 일에 대한 사과 등등 내용도 아주 개인적이고 친밀하고 다정하다.
편지 중에는 이름도 가물가물 기억이 나지 않는 이들도 상당수 있었다. 안타깝지만 이미 그들과의 인연은 멀어져 기억에서조차 사라진 것이다.
그 중에서도 교회 친구들은 주일마다 만나고 크리스마스 이브마다 거리를 돌면서 캐롤송도 부르고 연극 연습 등을 하면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기 때문에 이름이 하나하나 또렷이 기억이 난다. 매년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추운 겨울 밤거리를 걸어서 교인 분들의 집 앞에 가서 캐롤송을 부르는 것이 작은 소규모 교회의 관례였다.
차가운 밤공기를 뚫고 걸어가며 마냥 깔깔거리며 웃던 친구, 오빠, 언니들, 그들은 모두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더 이상 소식을 알 수 없는 그들의 삶이 사뭇 궁금해진다. 노래가 끝난 후 교인분들이 과자 등을 주시면 다시 교회로 돌아와서 밤을 새며 게임 등을 하면서 신나게 놀았다. 그 나름의 고민과 걱정이 있었겠지만 친구와 소통과 웃음이 넘쳐나는 시절이었다.
혼자 덩그라니 앉아서 오래된 편지와 카드들을 하나하나 읽는 동안 말할 수 없이 마음이 따뜻해져 왔다. 마치 숨겨 놓은 보물찾기를 하는 것 같이. 흐릿한 어린 기억을 되살려주면서 살아 움직이는 글자들. 정성껏 쓴 손 글씨에서 그들이 나에게 주었던 마음들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심지어 그림을 그리고 색칠해서 직접 만든 크리스마스 카드도 여러 장 있었다. 오랜 세월 잊고 있었지만 이들과 정말 순수하고 시름 없고 행복한 어린 시절을 나누었구나.
그들은 진심으로 나를 위해 기도하고 힘들 때는 용기와 위로를 주려고 긴 시간동안 정성 들여 편지를 썼다. 그들의 마음과 기도가 있었기에 내가 지금까지 아무 탈 없이 살아오지 않았나? 이런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이 편지를 내가 죽으면 나와 함께 묻어다오. 이런 비장한 마음도 들고. 아~ 화장하게 되면 강물에 뿌려다오.)
어쩌면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지인들과 훨씬 더 빨리 소통할 수 있는 다양한 수단들이 있다. 핸드폰, 메시지, sns를 통해서 실시간으로 소통 할 수 있고 누구보다도 빨리 서로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다. 그 시절에는 편지 한 통을 쓰고 우체통에 넣고 받기까지 몇 일 혹은 몇 주의 기다림이 있었다.
그 편지에 대한 답장을 또 얼마나 간절하게 기다렸던가? 그 지난한 기다림의 시간은 우리를 한없이 힘들게 하기도 했을 것이다. 하나 밖에 없는 집 전화기 앞에서 혹시나 놓칠 새라 걸려 오지 않는 전화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시간도 있었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그 시절만큼 끈끈하고 따뜻한 마음을 주고 받고 있을까? 각자의 방에서 서로의 삶을 몰래 들여다보며 '좋아요'를 눌러주는 것으로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걸까?
(물론 그 '좋아요'도 상당히 위로가 된다. 몇 안되기에 더 소중하고 계속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제는 이미 디지털 인간이 된 것일까?)
디지털 시대에 살고 매일 핸드폰 메세지를 보내며 글도 디지털 스타일로 올리지만 왠지 마음 한 켠이 텅 비고 쓸쓸해진다. 빠르기는 해도 항상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것 같은 사람들과의 소통. 세계에서도 가장 빠른 초고속 인터넷으로도 우리의 마음은 다시 연결되지 않는 걸까? 과연 다시 손 편지를 쓰는 감성을 되살릴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