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랖이란 단어를 참 싫어하는 편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 각자 살아가는 저만의 방식이 있는데 그다지 친밀한 관계가 아니라면 혹은 상대방이 충고를 요청하지 않았으면 남의 삶에 대해 왈가왈부 하는 건 예의가 없거나 인간 관계의 선을 넘는 행위라고 여긴다.
그런데 요즈음 아주 자연스럽게 오지랖을 부리는 내 모습을 문득 발견하였다. 꼰대같은 충고도 양념처럼 더하여서. 인간이란 참 타인의 허물은 귀신같이 보이는 데 내 허물은 한사코 안보이는 존재이다. (하아~도를 닦아야..)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그 아이들의 부모님과도 가끔씩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게 된다. 특히 사춘기 아이를 기르는 부모님들은 참 고생이 많다. 대부분의 부모님이 약속이나 한듯이 아이들과 싸우며 전쟁 같은 시간을 보낸다.
초등학생까지는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듣던 아이도 자아가 발달하는 청소년이 되면 갑자기 말 끝마다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면서 부모님의 의사를 따르지 않게 된다. 이에 격분하는 부모님도 같이 맞받아치고 둘 사이는 마치 적과 같이 대치되고 분위기는 냉랭해진다.
교사는 이 사이에 중간자적인 입장에 있다. 어느 쪽 편도 아니다. 한 아이와 일주일에 기껏해야 세 시간 정도를 만나기 때문에 어머니가 받는 정도의 지속적인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는 다는 점이 다르다.
내 돈 내어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는것도 아니니아이에 대한 기대치 자체가 낮다. 내 앞에서 한없이 조곤조곤하며 천사같이 행동하는 아이도 어머니는 집에서는 악마라 항변을 하신다. 천사와 악마라니. 대체 정체가 무엇일까?
아마 아이는 어머니와의 사이에 문제가 있을 뿐 다른 사람들과는 원만한 것 같아서어머니와 아이의 입장 둘 다 듣고 각자 이해해 보려고 해보았다. 양쪽의 의견을 듣다보면 제 삼자의 객관적인 통찰과 무언가 바로 잡아야겠다는 투지로 오지랖이 슬슬 발동되기 시작하고 어떻게든 이 둘을 화해시키고 싶다. 이 둘 사이에 흐르는 차가운 북풍 공기를 봄날 훈풍으로 사르르 녹여내리라.
하지만 한참 이야기를 신나게 하다보면 또 괜한 오지랖을 부린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슬그머니 생긴다. 사람이 아무리 진심을 다해 말을 해도 받아들이는 상대방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
게다가 내가 내리는 처방이 그다지 효과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심지어 묻지도 않았는데 너무 앞서간게 아닐까라는의심이 든다.
편지 한장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그들 사이에는 아직도 마음속 깊숙히 털어내야할 묵직한 앙금이 있는 것 같다. 사사건건 잔소리 하고 아이가 본인이 원하는 대로만 행동해주기 바라는 어머니가 더 문제인 것 같긴 하지만.
어머니는 아들에게 권태기가 오셨다고 했다. 아들에게도 권태기가 오나? 자식이 없는 미천한 자로서는 금시초문인 말이다. (아이고 어머님, 남편이 아니고 아들입니다요. 권태기가온게 다행이지요.)
예전에는 이렇게 오지랖을 부리며 이미 내뱉어 놓은 말들이 상대에게 어떻게 다가갔을 지 걱정하고 되지도 않는 막장 시나리오를 혼자 쓰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요즘에는 가능한 담백하게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깊이 생각하고 말을 했으면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였냐는 내 영역을 벗어난 일이다. 다만 진심은 늘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일뿐. 하지만 개인의 가정사는 직접 겪어보고 당사자가 되지 않으면 때로는 해결이 어려워보인다.
날마다 단순해지고 머리는 더 맑아지는 느낌이다. 오늘도 흐린 하늘과 스산한 바람이 지나가고 화창하게 해가 반짝 났다. 철쭉이 한 무더기씩 소담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옅은 분홍빛, 진분홍빛, 주홍빛, 빨강, 하양 등등의 색들이 오묘하게 섞이고 어우려서 빚어내는 또 다른 어여쁜 색들을 보며 세상 사람들도 각자 다른 색과 모양으로 살아간다는 자각이 들었다.
다만 우리가 함께 하는 세상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길 바라고 동시에 각자의 독특한 색깔을 인정해 주길.
얼핏 별꽃 모양의 뾰족한 꽃잎을 가진 민들레가 있는 것도 발견했다. 이제 민들레 꽃잎은 둥글둥글해야 한다는 편견을 버리자. 각자 고된 세상살이 중에 제 몫을 하며 제 색깔대로 고군분투하며 살아내는 개인의 삶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