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톡 리스트를 무심코 넘겨보다가 00호(00호인데 잘못 저장한)로 저장된 카톡 프로필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을 넘겨다보니 아직 파릇파릇함이 남아있는 이 남자는 아마도 이십대의 갓 취업을 한 직장인 같았다. 처음에는 녹색 수술복 같은 옷을 보고 ‘혹시 의사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가만히 다시 보니 작업치료사 라는 문구가 옷 앞주머니 위에 새겨진 것이 보였다.
젊음이 무기라고 이 남자는 꽤 훈남 스타일의 얼굴이었다. 실제로 사개월여 이 집에 이사 와서 살면서 이 남자를 대면하여 본 것은 단 한번이었다. 현관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몇 미터 밖에서 잠깐 보았고 이 남자는 급히 집으로 들어갔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감정도 좋지 않고 하니 키가 좀 아쉬운 편이라 생각하며 가자미 눈을 하고 째려보았다.
인간을 외모로 평가해서야 안 되겠지만 내 키가 166정도가 된다. 덩치가 좋고 다리가 좀 긴 편이어서인지 남들은 내 키가 항상 실제보다 더 커 보인다고 하고. 그러니 상대적으로 내가 왜소하게 보일 수 있는 나보다 건장하고 키가 큰 남자를 선호한다. 선호고 자시고 인간을 외모로 평가하는 것을 내려놓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그렇게 따지고 할 나이가 아니지만.
이 남자가 몇 개월 전에 자고 있는 아침 시간에 전화를 한 사건이 떠올랐다. 그 남자는 자기가 폭스바겐 차량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아냐고 대뜸 나에게 물었었다. 기가 찬다.
사실 나는 이 집에 살고 있는 이층 사람들의 얼굴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 이사를 나간 00호 남자는 한번도 본 적이 없으며 현재 살고 있는 00호 남자도 딱 한번을 봤을 뿐이다. 이 남자는 자신의 폭스바겐이 상당히 자랑스러운 듯 말을 꺼냈다.
폭스바겐이라. 언뜻 들어는 본 브랜드명이었고 이름으로 보아 독일산 정도 되는 수입차라는 상상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집 앞에 폭스바겐이 있는지 없는지 그 존재 자체를 몰랐다. 관심이 일도 없으니.
언젠가 짧은 유머 이야기 중에서 여자들이 차를 어떻게 구별하는 지에 대해서 나온 적이 있었다. 여자들이 차를 부르는 방법은 ‘큰 차’ ‘작은 차’ 였다. 공감하는 것이 나를 포함하여 내 주변의 여자들이 차 브랜드에 관심이 있거나 언급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여자들에게 차는 발등의 때만큼도 관심 없는 기계일 뿐이다. 아마 어느 유명한 브런치 레스토랑이나 인기있는 옷 가게 보다도 하등으로 취급받을 품목일 것이다.
남자들은 가끔 자신이 벤츠를 사는 게 꿈이라거나 BMW가 로망이라거나 하는 소리를 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아무튼 그 남자가 폭스 바겐을 언급한 이후에 지나가면서 이 차를 유심히 쳐다보기는 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 차는 흰 색에 눈에 뜨일까 말까한 아주 작은 독일 국기가 그려져 있을 뿐 모양새가 날렵하거나 쭉 뻗어서 육백만불의 사나이가 탈 것 같거나 인공 지능이 있어서 부르면 달려오는 키트 같은 멋짐이 뿜어져 나온다거나 하는 것도 없었다.
이 남자가 가소로운 이유는 이 집이 월세 40만원에 8평 정도 되는 원룸의, 서민 중에 서민 형의 십 년이 훌쩍 넘은 다세대 주택이라는 점이다. 이 남자가 외제차를 소유한다면 아마 그 월세를 기준으로 그 두 배이상의 월 할부금을 내고 있을 것이다.
이 폭스 바겐이 얼마인지 검색해 보기도 귀찮다. 아무리 집을 사기전에 차를 먼저 사고 인생을 즐기는 세대라지만 너무 앞서 가는 게 아닌가 싶다.
기쁜 소식으로는 이 다세대 주택에서 겪은 주차 전쟁이 일단락 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새로 이사온 00호 남자에게 단호하게 내 자리에 주차를 하지 마시라 통화를 하고 집주인에게 애걸복걸하며 통보를 한 이후에는 이 주택 오른쪽 구석탱이의 내 자리는 항상 확보가 되고 있다.
일층 음식점 주인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거의 24시간 음식점에서 살며 배달을 주로 하고 장사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단 한번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았다. 다행히도 이 주택 사람들은 불을 켜면 홀연히 사라지는 바퀴벌레처럼 만나기가 어렵다.
가끔 토요일 아침에 음식점에서 오후에 단체 손님이 있으면 아침 여덟시부터 이층, 옆집 사람들이 자기 차량을 일제히 빼준다. 하아~ 나는 수업이 있어서 얼결에 이 소동에 동참은 하고 있으나 대체 주말 아침에 자기 집에 살면서 차를 비켜주는 수고까지 요구하는 음식점 사람들의 인성이 참 이해가 가질 않는다. 아마 단톡방은 이런 공지를 하려고 이용하는 듯. 절대 안 들어 가련다!
게다가 이층의 폭스 바겐과 옆집의 검고 큰 차량은 항상 집 앞에 주차 되어 있다. 가끔 주말과 주중에 한두 번 차량이 비어 있을 뿐이다. 이렇게 운행을 안 한다면 폭스 바겐이 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참으로 이상한 것이 이 도시는 대중교통이 그야말로 거지같아서 차가 없이는 출퇴근이 거의 불가한데 매일 차를 집 앞에 얌전하게 모셔두기만 할 것이면 대체 왜 소유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 보면 내가 이 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완전히 백수 집단으로 오해하고 있을 수도 있다. 0층 폭스바겐을 소유한 남자는 대중교통으로 날마다 출근을 하는 아직 기력이 팔팔한 이십 대 청년이며 옆 집 아주머니 역시 매일 아침 아홉 시경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출근을 하고 있을지도.
이 집이 대낮에는 항상 인간 하나 보이지 않고 고요한 것을 보면 다들 제 할 일들을 하면서 차는 집에 고이 놔두고 열심히 일하고 있을 것이다.(라고 가정하는 것이 내 정신건강에 좋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나는 음식점 아저씨가 평한대로 폐쇄적인 이상한 인간일 수도 있다. 다만 과외 생활을 시작하면서 느끼는 점은 이 일이 내게 꽤 잘 들어맞는 직업이라는 것이다. 인간들과의 단체 생활을 할 필요가 없으며 시간이 자유로운 일. 그리고 이웃과는 사실 그다지 소통하고 싶지 않다.
이웃과 날마다 교류를 할만큼 내 정신이 멀티 태스킹이 되는 훌륭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집안 꼴도 누군가 에게 오픈할 만하지가 않다. 그래서 이들의 갑작스러운 문 두드림에 더욱 예민하였는지도 모른다. 정리되지 않는 걸 보여주는 것도 싫어한다. 그저 개인시간에는 자유롭고 혼자 있고 싶은 정상적인 보통의 인간.
뭐~ 결론적으로는 객관적으로 보아도 그다지 사회적인 인간이 못 된다고 봐야겠다. 그럭저럭 이 다세대와도 화해의 무드가 조성되고 있고 바퀴벌레처럼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에서 자판을 두드리면서 아무 방해도 받지 않는 삶에 만족할 뿐. 씨익~조커인가?
나의 길을 걷고 있을 뿐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