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밝게 비춰들어오는 화창한 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주말의 오전, 평화가 가득한 공간에 카페 안에 노래 한 곡이 흘러간다. 독특한 음색을 가진 가수의 팝송. '기억은 너를 부른다' 이런 한 구절을 듣고 매료가 되어 나중에 기억만으로 노래를 찾아보았다. Maroon 5의 'memories'라는 곡. 이미 인기의 절정에 올랐던듯 하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된 메니저를 기리며 만든 곡이라고 한다.
추석을 앞둔 맑은 휴일날. 서대문에 있는 돈의문 박물관 마을이라는 곳에 방문하였다. 도심 가까운 곳이어서 주변에는 고층 건물들이 가득하지만 그 사이에 자리잡은 이 마을은 시간을 비껴간 듯이 오목하게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오래된 마을이 도시 개발로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 하여 뜻을 모아 박물관으로 보존하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은 단지 한 두 골목 정도 되는 작은 규모만 남아 있었지만 그 시대 사람들이 아직도 살고 있는 것처럼 가구나 소품들이 무심하나 매우 정교하게 전시되어 있어서 무척 인상 깊었다. 1960~80년대쯤에 삼촌이 함께 살고 있는 할머니 집을 방문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할머니가 무던히 돌리셨을 것 같은 수십 년의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청록색 재봉틀도 있고 19인치 조그만 화면에 채널을 바꾸려면 가까이 가서 버튼을 돌려야 하는 티브이도 있었다.
'용건만 간단히'라는 문구가 적혀진 새카만 전화기도 눈에 띤다. 지금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버린 낯익은 각종 영어 사전들도 반가웠다. 전자사전이 나올 때까지 이 벽돌만큼 두꺼운 사전을 가방에 꾸역꾸역 넣어다녔었는데.
열살 무렵까지는 할머니와 함께 살았으니 어린 시절 우리집의 풍경과도 꽤 비슷하다.
동네 문구점에서 팔던 종이 인형놀이도 눈에 들어왔다. 그 시절에 문구점에 들어가서 비슷한 바랜 색감의 종이 인형을 골랐던 기억이 문득 눈앞을 스쳤다. 그러고 보니 내가 어린시절을 보낸 곳도 서대문 근처였다. 지금은 흐릿한 기억만 남아 있지만 이와 비슷한 구불구불한 작은 골목이었다. 세월의 때가 켜켜이 묻어있는 낡은 소품들을 보니 그 시절의 단편적인 기억들이 빼꼼 고개를 들었다. 골목에서 아이들과 고무줄 놀이하고 소꿉놀이하고 하던 시절의 햇빛이 찬란했던 시간들. 아무 시름이나 걱정없이 노는 것이 일상이었던 어린아이와 가족 같이 살가웠던 이웃들.
현재를 살아가느라 과거는 점점 잊혀져만 간다. 바쁜 일상을 보내느라 과거의 한때를 다시 소환해 올 시간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을 담고 있는 물건들을 보니 옛 시간들이 다시 꿈처럼 아련하나 다정하게 다가온다. 아쉽고 그리운 시간과 공간과 사람들이.
마을을 벗어나 걸어나오니 경희궁이 바로 옆에 있었다. 푸른 잔디가 펼쳐진 궁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가니 조선시대로 시간 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왕비였던 무수리였든 옛 사람들이 떠난 이 궁을 걸어가면서 그들의 똑같이 고단하고 때로는 행복한 희노애락이 버무려진 삶을 밟아보는 것 같다. 어쩌면 정적이 난무하는 왕비보다는 평범한 무수리로 사는 것이 백번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옛스러운 기와지붕 위에 높이 솟아 있는 고층 건물이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결국은 현재라는 시간까지 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유일무이한 폭풍같은 삶이 이 공간을 거쳐간 것이다.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한 공간에 펼쳐져 있다는 것은 조화롭고 아름답다. 노인과 아이가 함께 섞여 한 마을에서 살아가는 것과도 같다. 지난 시간을 기억하면서 그 따뜻한 기억들을 모아 현재를 더 잘 살아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