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오후에 비 님이 잠깐 지나갔다. 한가하기 이를 데 없는 휴일 오후에 듣는 빗소리는 반갑기만 하다. 일주일이 넘게 폭우가 쏟아져서 여기저기에서 심각한 물난리를 겪는 걸 보니 마냥 즐거워할 수는 없었지만.
집 안에 가만히 앉아서 듣는 빗소리는 진정 나지막이 마음을 진정시켜주는 피아노 연주곡이다. 아무 걱정 근심 말라며 나지막하게 속삭여주는 소리. 스르르 잠이 올 것 같은 부드러운 자장가 소리. 정신이 몽롱해질 정도로 뜨겁게 달아오르는 여름의 열기를 식혀주는 단비.
나의 방은 작은 베란다와 부엌 사이에 끼어 있는 구조라 빗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창문마저 작아서 빗소리를 들은 게 맞는지 한참을 들여다봐야 한다. 이 방 양쪽의 문을 열고 나설 때만 쏴아하며 내리는 빗소리가 달려온다. 문을 활짝 열어놓고라도 비 오는 소리를 더 가까이 듣고 싶다. 손바닥만한 창문으로 보이는 빗줄기라도 아무 시름 없이 오래도록 바라보면서.
비는 유예의 시간을 준다. 휴일이라도 이렇게 게을러지면 안된다고 채근하는 마음을 토닥토닥 어루만진다. 더없이 게으른 하루를 보내도 무사하리라는 말을 건네준다. “그래, 괜찮아. 하루쯤은.”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유투브도 보고 온종일 딩굴딩굴 거려도 괜찮아. 이미 작정하고 있는 마음에 공모하여 그럴싸한 핑곗거리를 거들어주는 비.
하지만 집을 나서는 순간에 이 비는 순식간에 원망스러워진다. 빗속을 뚫고 운전을 해야 한다거나 갓길에 고인 물에 놀이공원에라도 온 듯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달리자면 움찔 마음이 쪼그라든다. 우산도 없이 비 오는 밤길을 걸으려면 비는 섬뜩하게도 차갑게 목덜미에 닿는다. 마트에 가니 지하 주차장에 물이 차서 무빙워크가 작동을 하지 않았다. 터져 나오는 한숨을 막으며 바리바리 양손에 일용할 양식을 들고 주차장까지 걸어갔다.
인간의 마음이란 이리도 변덕스럽다. 오후에는 반가운 손님 같았던 비가 저녁 무렵에는 초대하지 않은 귀찮은 존재로 전락해버린다. 어쩔 수 없다. 인간은 원래 처한 환경에 따라 마음이 갈팡질팡 한다. 구름이 끼었다 해가 났다 오락가락하는 비와 비슷하다.
비가 오는 바람에 이사 가려는 계획이 잠잠해졌다. 이 거센 비에 대항하여 새집을 둘러보러 다니려는 마음이 싹 사라지는 바람에. 비가 그치면 다음 주에 살짝 가 볼 수도 있지만 일단은 꼬리를 내렸다. 분을 낼 만큼 내고 보니 하잘것없는 주차 따위에 왜 그리 집착하나 하는 자각이 들기도 했다. 언제 또 마음에 불이 일지도 모르지만 시원하게 내리는 비가 식혀줄 것이다.
지금은 한 마리 굶주린 짐승 처럼 으르렁거리는 빗소리가 맹렬하게 들린다. 아, 이제 그만하소서!
그냥 웃어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