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미셸 Michelle Dec 07. 2019

나를 사랑하는 방법

191207

  오늘 좋아하는 언니와 만나서 신나게 수다를 떨고 들어왔다. 신기하게도 내 인생에는 참 감사하게도, 은인 같은 좋은 사람들이 늘 있어왔는데 (그리고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들과 낯부끄러운 실패와 넘어짐의 순간들도 늘 있었는데...ㅎㅎㅎㅎ) 놀랍게도 이 언니는 나와 기숙학교에서 1년 반을 룸메를 하며 보낸 내 단짝 친구와 이름이 같다!ㅋㅋㅋ 요런 사랑스럽고 멋진 내 인생의 소중한 사람들 같으니라구!


    또 어제는 내가 마음이 힘들 때 나를 수렁(?)에서 끌어 내주었던 고마운 동아리 후배와 밤늦게까지 카톡으로 딥토크를 하면서 나를 사랑하는 일이 그 어떤 일보다 우선이 되어야 한다며 열변(?)을 토했다.. 엄청 확신에 차서 자기 사랑(?) 열강을 했지만.. 오늘 만난 언니도 내가 요즘 득도한 것 같다며ㅋㅋㅋㅋ 엄청 웃었다. 그런데 사실 나도 요즘은 몸이 다소 피곤해도 마음이 엄청 편안한 상태이다.


  심지어 나는 요즘 나를 정말 정말로 사랑하는 상태다. 26년 처음으로 있는 그대로의 내가 너무 좋고, 마음이 너무 편안하고, 가만히 숨만 쉬어도 마음이 충만하다며, 기승전 명상을 권하기도 했다.


  고백하건대, 나는 내가 먼저 나를 사랑해주는 것을 참 어려워했다. 남들은 있는 그대로 자존감이 참 높아 보이고, 누가 봐도 잘 지내는 것 같고.. 그런데 나는 그에 비하면, 누가 봐도 겉으로 보기에는 적당히 교육 잘 받고, 하고 싶은 것들 다 하는 것 같고.. 가진 게 많아 보여도 사실 늘 무언가 결핍된 사람처럼 항상 느꼈다. 끊임없이 있는 그대로의 내가 부족하고, 뭔가 더 해내야만 될 것 같아서 스스로 채찍질을 많이 하는 성격이었다. 계속 더 나아지는 멋있는 사람만 되려고, 외부의 평가들에 많이 의존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수많은 자기부정(?)의 시간 속에서 나에게 처음으로 편안함과 따스함을 준 사람 이야기를 하려고, 오늘은 글을 시작해 본다.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도, 나에게 한 때 소중한 사람이 되어 주었던 그 친구에게도 따스한 연말이 되길 바란다.








    '나'에게 '나'를 사랑하는 일이란 처음부터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는 그냥 부끄러운 적이 참 많았다. 아주 어렸을 때 잠깐 미국에서 유아원을 다녔고, 이후 유치원 때부터 다시 한국에 살기 시작했는데 그런 환경적인 변화가 내게는 생각보다 스트레스였다. 게다가 음식에 있어서도 승부욕이 있어서 동생들보다 빨리, 많이 먹는 게 가끔 내가 경주에서 이기고 있는 거라는 생각도 했었다ㅋㅋㅋ 그래서 초등학교 1학년 때는 토실토실 살이 올랐었고, 지금 다시 초등학교 1학년 사진첩을 봐도, 보름달 같은 얼굴 하나를 찾으면 그게 내 얼굴이다ㅋㅋㅋㅋ


    그렇게 통통한 체구였다 보니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부끄러운 게 참 많았다. 달리기에서 다른 친구들보다 느린 것도 통통한 내 몸 때문인 것 같아 창피했고, 여자인 친구들을 사귀는 데에 있어서도 다른 친구들이 내 통통한 몸 때문에 나랑 친구를 하기 싫은 건 아닐까 싶어서 나도 모르게 친구들에게 먼저 마음의 벽을 칠 때도 있었다. 왠지 모를 나의 부끄러운 마음 때문에 저학년 때는 내가 내 감정에 솔직하지도, 나를 또 어떻게 표현할지도 몰랐다.


    그러다가 이제 자연스럽게 고학년에 올라가면서 2차 성징을 겪었고, 또 자연스레 살이 빠지게 되었는데 사실 마음 한편 깊숙이 부끄러운 마음은 여전히 존재했다. 친구들이랑도 잘 지내게 되었고, 더러 반에서 회장도 했고, 뽀로로 모드로 이 친구, 저 친구들 무리에 섞여 '노는 게 제일 좋아'가 되었지만, 그러면서도 왠지 모르게 마음 한편에 부끄러운 마음은 가시질 않았다. 그건 아마도, 전쟁 같은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내가 나의 모습을 어떻게 사랑해줘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부끄러운 청소년기를 지내고 있을 무렵, '놀라운 친구'를 만났다. 때는 고등학생 때였고, 우리는 빡빡한 입시 경쟁의 희생양(?)이었다. 학교에서는 연애 금지령이 내려졌지만, 그 놀라운 친구를 좋아하는 내 마음은 그 어떤 계엄령도 막지 못했다.


    여자건 남자건 두루두루 친구가 많고, 주변에 언제나 그 아이에게 장난치려고 하는 친구들이 많았던 놀라운 친구였다. 나한테 '친구'는 어쩌면 내가 마음을 쓰고 노력해야 하는 어려운 존재일 때가 있었던 반면, (물론 다른 아이들이 보기에는 내가 친구들을 쉽게 사귄다고 보였을 수도 있겠고, 실제로 그런 말도 자주 들었지만, 다 노력의 결과였다..ㅋㅋㅋㅋ) 반대로 그 아이는 주변에 늘 친구들이 머물렀다. 그러면서 그 아이 자체도 참 편해 보이고, 친구들과의 관계 자체를 즐기는 게 눈에 보였다. 그리고 그 관계는 친구들에 머물지 않았다. 어느 선생님도 그 아이를 참 진실되고 편안하게 대하시는 모습이 눈에 선했으니까.


    그리고 어느새 몽글몽글 내 마음속에도 그 아이와 친구 이상으로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피어올랐다. 다행히 그 아이는 반에서 꽤나 수학을 잘하는 친구였다! 그렇게 나는 아는 수학 문제도 일부러 그 친구에게 가서 물어보기 시작했다.. 경제도 잘하는 편이었다! 더할 나위 없는 찬스.. 그렇게 경제도 간간히 물어보며 얼굴을 텄다! 친한 여자인 친구에게는 '나 사실 우리 반에 좋아하는 애가 있는데... 딱 너한테만 말하는 거야!'라며 한 3-4명 한테는 말을 했던 것 같고, 급기야는 학급에서 자리를 바꾸면서 그 아이와 앞뒤로 앉게 되자,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게 고등학교 1학년 끝물, 겨울 방학 전이었고, 끝끝내 그 아이와 문자 친구가 된 나는, 내 기억이 맞다면, 어느 눈 오는 날 저녁부터 사귀기 시작했다.


    그리고 '꿈만 같은 시간이었다'라고 할 수 있으면 우리 인생 참 편하고 좋겠지만, 우리는 요즘 초중학생들도 다 한다는 그 흔한 스킨십 한 번을 한 적이 없다. 대신 그저 자습실에서 가까운 자리에 앉아서 공부하기만 해도 마음이 콩닥콩닥거렸고, 저녁 자습 전 각자의 기숙사에서 짧게나마 하는 통화가 그렇게 기뻤고 또 잠시라도 헤어지는 게 서글펐다. 그리고 그 아이가 그렇게까지 많은 팝송을 알고 있고, 듣고 있다는 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는데, 매일매일 나에게 새로운 팝송으로 마음을 표현해주는 그 아이 덕분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게 그렇게 마음이 간질간질, 참 고마웠다. 그 아이 덕분에, 학교로 향하는 모든 아침이, 눈을 뜨는 모든 순간이, 내게는 감사였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까지 잘 사귀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대부분의 첫사랑이 그렇듯, 내 첫사랑도 서툴고, 어설퍼서 우리는 반년 후에 헤어졌다. 중간고사 시험이 끝나고 딱 한 번 영화를 보는 데이트를 한 후였고(너무 떨렸어서 무슨 영화를 봤는지는 기억도 안 나며, 데이트 내내 헛소리만 지껄였기에 '내가 최악의 데이트로 만들었어!'라며 친구들에게 호들갑을 떨었던 기억만 난다), 기말고사를 보던 어느 시험 기간이었는데 여느 때처럼 전화가 왔다. "이제 우리는 헤어져야 할 것 같다"라고.. 정말 영문을 모르겠는 통보였지만, 자존심은 있었던 내게 '대체 왜?'따위는 선택지가 아니었다. "그래, 그러자"라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고, 혼자 벽에 기대 자책하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여름은 왔고, 나는 분노의 다이어트에 돌입했다. 어떻게 나를 찰 수가 있지? 나를?! 나아르을?!!


    그리고 몇 개월이 지난 후에 남자아이들과 친했던 내 룸메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 아이가 나와 헤어지기로 결심한 이유를.. (그렇다. 세상에 비밀 따위는 없다.)


    "너랑 계속 사귀고 있으면, 둘이 같이 약속했던 대학교에 못 갈 것 같았대. 너는 가고, 걔는 못 가고.."


    무슨 그런 멍청한 이유가 다 있냐! 고도 생각했지만, 그 말을 듣고 그제야 떠올랐다. '우리 꼭 같이 S대 가서 CC 되자!'라고 했던 수많은 미래를 그리던 약속들 중 하나를, 그 아이는 진심으로 기억하고 지키려 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당시에 나는 그 아이보다 꽤 공부를 잘했던지라, 그 아이가 나도 모르게 내심 자신의 수능 성적을 걱정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물론 세상 일이 참 쉽지 않아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둘 다 약속했던 대학교에 가지 못했다. 나는 재수를 했고, 나중에 친구를 통해 알게 된 거지만, 그 아이도 재수를 했다. 이후 내가 신촌에 있는 대학교에 다닐 동안 그 친구는 군대도 일찍 갔고, 늦깎이로 학생이 되는 20대 초반을 보냈다고 들었다. 그리고 이후에 신촌에 있는 옆 학교를 다닌다는 소식만 간간히 들었다. 지금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으려나..


    그래도 그 아이에게 나는 지금까지도 참 감사하고 있다. 모든 게 어설펐고, 부끄러웠고, 나 자신조차 나를 어떻게 사랑하는지 몰라서 헤매기만 했지만 모든 게 설렜던 고등학교 시절을, 첫 수능이 끝나고까지도 한참을 잊지 못했던 내 아팠던 첫사랑을 함께 보내며, '나도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 아이 덕분에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놀라운 친구에게 오늘은 고마워하는 글이 되었다.. 원래 이 이야기를 쓰려던 게 아니었는데, 쓰다 보니 다른 길로 샜다. 사실 오늘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은, 그 아이를 시작으로 여러 관계들을 거치면서 깨달은 점이다. 요즘은 그 무엇보다 '내가 나를 먼저 사랑해야 하는구나'를 마음 깊숙이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


    요새는 여러 고마운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많고 적음은 주관적인 척도이므로! 흠흠..) 대학교 때와 달리 조용하고 고요하게 지내고 있다. 그리고 초등학교 1학년 때 같이 까지는 아니지만, 대학교 때에 비하면, 회사를 다니면서 살이 조금 올라 건강을 위해 운동으로 몸을 관리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렸을 때와 달리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내가 너무 좋다. 그리고 나는 내가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임을, 그리고 무언가 꾸미거나 덧대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의 나도 꽤 괜찮은 사람임을, 또 '내가 나를 먼저 인정해줘야' '다른 누구도 나를 사랑해줄 수 있음'을 이제는 알고, 나에게 샘솟는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도 충분히 나눠주고 싶을 만큼 마음이 풍족하다.


    우리는 참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가 맞는데,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몰라서, 참 많이 헤매고 괴로워한다. 그렇게 누군가는 신앙의 힘을 빌어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되고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누군가는 이성 친구가 생겨서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된다(과거의 나처럼). 혹, 누군가는 여전히 자기 자신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헤매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나 자신'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만큼은 "~때문에"라는 괄호를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예쁜 외모 때문에" 혹은 "내 멋진 몸매 때문에" 혹은 "내 잘 나가는 직장 때문에", "신께서 나를 사랑해주기 때문에", "부모님이 나를 누구보다 예뻐해 주셨기 때문에" 기타 등등... 하지만 그런 수많은 "~때문에"로 시작한, 외부에서부터 시작한 사랑은 그 외부 요인이 없어지면 함께 없어지고 만다. 그러니까, 어렵게 말하지 말고, 다시 본론만 말하자면.. 결국 '나 자신'은 '그냥'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나 자신'에게 '그냥'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다. 나는 그만큼 소중한, 이 세상에 단 한 명뿐인, 특별하고도 아름다운 존재니까.


    그리고 다시 한번, 이 글을 빌어 그 아이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그 아이는 이미 고등학교 때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적어도 나에게 그 아이는 "~때문에"가 없는 아이였다. 어쩌면 평범하디 평범한 외모, 크지 않은 키, 높지 않은 성적.. 하지만 항상 밝고 친구들이 많았던 그 친구. 그 아이는 그 어떤 "~때문에"는 없었지만, '그냥'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았다. 그랬기에, 지금 떠올려보면, 그 아이는 그 어린 나이에도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 친구들이 되었건, 선생님이 되었건, 이성 친구가 되었건, 무한한 사랑을 나눠준 것 같다.


    그 아이가 지금 내 이 부끄러운 글을 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보게 된다면 나의 이 고마움을 정말 정말 가득 담아 전하고 싶다. 그때의 네가 있어, 오늘의 내가 있다고. 그렇게 서툴렀던 나는 다시 나로 자라, 나를 사랑할 줄 알게 되었다고. 이걸 깨닫게 해 주어, 참, 참, 고맙다고.

매거진의 이전글 나찾글8. 나는 누구일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