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어. 아버지와 아들은 눈보라가 치는 고속도로를 운전해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지. 그런데 갑자기 바퀴가 헛돌기 시작하는 거야. 아버지의 숨이 가빠왔어. 핸들을 꼭 잡아도 소용이 없었어. 눈 깜짝할 새였거든. 자동차는 그대로 가드레일을 박았어. 아버지는 즉사했고 아들은 중상을 입었어. 얼마 지나지 않아 눈보라를 뚫고 구급차가 도착했고, 아들을 태운 구급차는 사이렌 소리를 흩날리며 병원으로 향했단다. 그리고 병원에 도착했을 때였어. 환자를 옮기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네? 담당의사가 수술을 거부한 거야.
‘저는 수술을 할 수 없습니다… 제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었을까?
다양한 정답이 있을 것 같지만 사실 답은 하나입니다.
처음 이 이야기를 친구로부터 들었을 때, 저는 한참을 알쏭달쏭해했습니다. “게이 부부였을까? 아니면 오래전에 아들을 잃어버렸던 친부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참지 못해 결국 정답을 물었습니다. 적잖이 충격적이었습니다.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데, 바로 정답을 맞추셨다면, 그건 제 책을 읽고 계신 여러분이 이 책의 주제를 알고 있어서일 가능성이 큽니다. 주변 사람 아무나 붙잡고 한 번 문제를 내 봐주세요. 그런다고 제 부끄러움이 가시지는 않겠지만, 80%이상이 맞추지 못하실 것이라고 저는 장담합니다.)
저는 대학교까지 도합 10년이 넘는 시간을 여자도 일할 수 있고, 전문직을 가질 수 있다고 교육받아왔습니다. 또한 여자들만 가득한 ‘여대’를 다니고 있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가장 친한 친구 중에 한 명도 의대를 다니고 있는데, 제 머릿속에 의사는 남자가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더 박혀 있었던 겁니다. 사실 이런 생각은 ‘유치원 선생님’이나, ‘엔지니어’를 떠올릴 때도 발생합니다. 우리는 유치원 선생님을 떠올릴 때 남자를 떠올리지 않고, 엔지니어를 떠올리면서 여자를 떠올리지 않습니다.
2부는 이런 고정관념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고정관념을 함께 바꾸어나간다면,
우리 모두 더 자유롭고 풍요롭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까지 왈가닥인 학생이었습니다. 아파트 단지에서 살았지만, 여름이면 동생들과 친구들을 데리고 나가 매미를 잡으며 놀았고, 놀이터에서 얌전히 소꿉놀이를 하기보단 의자를 뛰어다니며 술래잡기를 하거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같은 활동적인 놀이들을 더 즐겼습니다. 뛰다 자빠져도 즐거웠습니다. 자라면서 컴퓨터를 배우고, 고학년에 회장이 된 후로는 반 친구들끼리 릴레이 소설을 쓰는 인터넷 카페를 만들어 상상의 나래를 펼치거나, 온라인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밤새워 월드컵을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중고등학교를 가면서 ‘말 없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대학교 친구들은... 믿기 힘들겠고, 사실 나도 믿기 힘들지만) 좋아하는 밴드를 위해 소리 질러 응원하던 건 모니터 뒤에서 일 뿐 정작 현실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였습니다. 2차 성징을 겪고 사춘기를 겪으면서 점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게 된 겁니다. 집에서는 엄마, 아빠와 자유롭게 이야기를 했지만 바깥에 나가면 왠지 조용한 아이로 지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제 의견을 지나치게 많이 표현하면 “넌 왜 그렇게 뾰족하니” 또는 “넌 참 남자아이 같다”라는 말을 들을까봐 무서웠습니다. 사실 되돌아봤을 때 놀라운 건, 제 부모님 중 그 누구도 제게 “넌 남자아이 같다”거나 “뾰족하다”거나 하신 분들은 없었지만, 제가 자라면서 배운 ‘여자 아이다움’은 제가 가진 성향과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100 정도 행동하고 싶다면 늘 20, 30 정도로 표현하며 답답해 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참았다가 일부만 말했고, 말하기보다는 들으려 했고, 듣고 무언가를 위해 나서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서포트해주기만 했는데, 이런 특성들만이 누구나 인정해주는 ‘여성스러움’이 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답답함이 여성스럽지 않아서 사랑받지 못할까 봐 피어오르는 두려움보다는 나았습니다.
그리고 대학교에 들어와 잠시 잊혔던 자아를 찾았는지, 본래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1학년 때는 친구들과 수업 시간도 빼먹고 야구를 보러 가며 행복해하고, 인터넷 게임인 LOL을 PC방에서 밤새워하기도 했습니다. (이건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게임을 못해도 캐리 해주며 즐겁게 놀아준 친구들 덕에 가능했습니다.) 아무튼 그런 하루하루가 있었기에 농활에 다녀와 까맣게 그을려도 그저 좋고, 이나라 저라나를 여행 다니며 모기에 물려도 그저 좋았습니다. 신기한 일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여대”라는 집단에 속한 상태로 뛰쳐나온 세상에서 ‘나는 나 자신 그대로여도 괜찮구나’를 다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런 개인적인 고백을 하는 걸까요?
이 책을 쓰는 제 개인적인 출발점이 저만의 출발점이 아닐 거라고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런 ‘여성스러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면, ‘남성스러움’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남자분들도 있을 겁니다. 아이를 집에 두고와 일을 하면서도 아이가 눈에 밟히는 워킹 맘이 있다면, 회사에서 업무를 하면서도 모든 막중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고위직이 싫거나 집에 빨리 돌아가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워킹 대디도 있을 겁니다. 사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지 누구나 이런 마음들을 가질 수 있고, 그런 마음들은 사실 소중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런 당연한 마음들을 당당하게 수면 위로 끌어올려보면 어떨까요? 솔직한 마음들이 더 드러난다면, 그렇게 조금 더 나은 세상을 함께 만들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렇게 언젠가는 그 마음들이 남자는 군대의 문제로, 여자는 임신과 출산, 혹은 육아의 문제로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던 지금의 한 때를 역사책들의 한 페이지로 장식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딸이며, 아버지이고, 아들이며, 어머니입니다. 625 전쟁 이후,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지금은 평균 연소득 2만 달러가 넘는 경제 대국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한강의 기적’이라고 해왔는데, 이때 한강은 한 명 한 명의 땀방울들로 이루어져서 ‘한강’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모두의 노력 덕에 가능했습니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거리로 쏟아져 나와 촛불 혁명으로 잘잘못도 바로 잡았고, 더디지만 지금도 더 나아지는 과정 중입니다. 생활수준과 시민 의식도 점점 나아지고 있습니다. 생활 방식으로는 북유럽의 모델들, “개개인의 행복과 지나치게 경쟁적이지 않은 고요한 개성”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시민 의식'도 성장하고 있습니다. 나아지는 과정은 영원합니다.
우리는 더 잘할 수 있는 능력과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것들을 발휘할 때입니다. 함께 할 때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익혔으니, 익힌 걸 바탕으로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