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4월 강원도 양양에서 산불이 났다. 진화되는 듯하였지만 불길은 다시 살아나비무장지대(DMZ)까지 번졌고 낙산사를 삼켜버렸다. 산불 이후 정부 위기/재난 대응 매뉴얼을 만들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1차 매뉴얼은 죽을 쒔다. 책상 앞에서 공무원들이 써 내려간 매뉴얼은 현장의 것과 괴리가 컸다. 고 노무현 대통령은 그 점을 간파해 다시 작성하라는 지시를 여러 번내렸다. 모두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몸에 사리를 만들며 완성된 재난대응 실무 매뉴얼. 그 뒤 2007년,태안 기름유출사고로 다시 재난대응 매뉴얼의 필요성을 재인식한 우리는 매뉴얼의 완성도를 다시 한번 검토하기도 했다.
그렇게 태어난 재난대응 실무 매뉴얼. 사실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의 성과였다. 그것이 못마땅했을까. 이명박 대통령의 인수위원회에서는 참여정부 시절 기록물을 쳐다보지도 않았고 재난대응 매뉴얼 역시 마찬가지, 폐기되다시피 했다. 안타까웠다. 100퍼센트 완벽한 매뉴얼은 아닐지라도 각 정부 부처의 피땀이 서려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명 '빠꾸'를 여러 번 당하며 완성도를 높인 것이어서 더욱 애정이 갔다.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정당이 정당의 주인이 되어도 기본적인 것은 이어가야 되는 법안이 있으면 싶었다. 법 안에서 그것이 되지 못할지라도 그것을 할 수 있는 안목과 역량이 있는 사람이 리더가 되면 되는데. 자기 사람들에게 욕먹는 것을 무릅쓰고 상대 정당이나 정부의 성과를 그대로 이어갈 만한 대인배는 세상에 없는 것인가 한숨이 나왔다.
그렇게 폐기된 매뉴얼은 존재조차 잊혔고 우리는 2014년도 4월, 세월호 사건을 맞았다.
그날 나는 외국에 거주 중이었다. 세월호 선체가 기우는 것을 보며 걱정을 하고 있는데, '전원 구조'라는 뉴스 자막이 속보로 떴다. '정말 다행이다.' 안심하고 잠을 잤다. 다음 날, 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충격이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모든 국민이 그런 충격 앞에 시간은 정지한 것 같았고 우리는 모두 얼어붙었다.
그리고 뒤집힌 세월호가 티브이에서 나오고 있는 것을 여러 번 본 첫째 아이는 "엄마, 저기에 타고 있던 형, 누나들은 언제 돌아올 수 있는 거야?"하고 묻기도 했다. 어떤 말로 설명을 해야 할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의 슬픈 기억은 다음 해 인양작업이 마칠 때까지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그리고 우리는 입체적으로 이 문제가 어디서 기인했는지 검토하는 작업을 시작했다.언론인, 그리고 학자, 공무원, 학생, 그리고 주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다짐하고 또 다짐해 보았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유가족의 기사를 보며 함께 울었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지나고 10년마다 주기적으로 유사한 참사가 일어나는데 제도와 시스템을 정비하지 않는다며 이민을 결심한유가족의 따끔한 지적에 우리는 각성하기도 했다.
세월호 선체가 항해할 수 있게 한 정부의 규제 완화에서부터 재난 대응 점수 0점이었던 세월호 선장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안일함과 무능함을 탓하는 분위기가 생겨났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우리의 안일함이 대형 참사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뼈에 새기고 또 새겼다.그리고 내가 큰 일은 못하더라도 마주하는 내 삶의 영역에서라도 경각심과 문제의식을 가져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2020년,
코로나 19를 맞이한 우리
작년 12월 뉴스에서 '원인 모르는 폐렴으로 중국인들 죽어가'라는 기사가 연일 나왔다. 원인 모르는 폐렴이라니 왠지 꺼림칙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나라에 상륙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엄습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내 코로나 바이러스 감기라 이름 붙여졌고 불안감은 현실이 되어 우리의 것이 되었다. 이번 코로나 19 대유행은 과거 메르스와 사스 때의 경험이 기반이 되어 마련된 대응 매뉴얼에 따라 시의 적절하게 각 부처가 유연하게 협력했다. 확진환자, 검사 진행, 격리해제 등의 수치는 혼란스럽지 않도록 한 곳에서 취합하고 발표하는 것으로 정리했다.전원 구조와 같은 어이없는 발표, 그리고 혼란을 주던 맞지 않던 구조인원의 숫자와는 상반됐다.
신속하고 선제적인 대처는 지금 전 세계의 대처 모델이 되고 있고 우리가 재빠르게 신설한 드라이브 스루 진료소는 여러 나라가 앞다투어 도입하고 있다는 소식도 이어지고 있다. 애초 중국도 그랬고 유럽에서도 이동 제한령으로 국민이 거리에 나서는 것을 극도로 꺼리고 있지만, 우리는 국민의 이동을 막지 않고 개방을 유지하며 대응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이는 국가뿐만이 아니라 국민의 합의가 바탕에 깔린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의 무능함과 안일함으로 지불해야 했던 소중한 목숨을 다시 살아오게는 하지 못하지만, 이런 사태에 우리 스스로를 자제하고 희생함으로 그리고 정부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다른 이들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고 지켜나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는 이런 사회적 참사에 대해 여전히 막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다.몇 국회의원들도 그 사람들의 마음을 동조하고 선동하느라 막말을 쏟아내기도 한다."교통사고로 죽는 사람들의 수를 아느냐, 자식을 담보로 돈을 뜯어내려고 한다, 정쟁을 만들어 이득을 보려고 한다."고도한다. 사회 분위기를 이렇게 조성해서는 안된다. 참사에 대한 객관적 성찰이 필요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정서적으로 공감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외면하지 않고 탐구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어려운 일이다. 나는 나와 다른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만나거나 보거나 들으면, 내 안에서 들려오는 첫 목소리는, '뭐야, 저런 사람도 다 있네? 뭐야, 왜 저렇게 이야기하는 거지? 그건 틀린 거잖아.'다. 부끄러운 나의 본능의 소리다. 선을 긋고 탓하며 비판한다. 그러고 나서는 다른 작업이 내 안에서 일어난다. '내 아이가 저렇다면, 내 아이가 저 사람의 아이라면, 내 가족이 저렇다면.'하고 말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그리고 아이를 갖고 나서 생긴 변화 중 하나다. 그렇게 생각하면 완벽하지 않더라도 어떤 마음의 자세로 그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 나은 것인지 스멀스멀 올라온다. 갑이 아닌 을의 입장에 서 보는 것이다. 강자가 아닌 약자의 기준으로 사회 정의와 윤리의 원칙이 세워진다면 하고 바라보기도 한다.타인의 문제가 모든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보편적 문제라는 깨우침에서 오는 진정한 공감은 고통에 처한 사람들을 동정의 대상으로 소비해버리는 오만함을 떨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6년 전 오늘로 인해 고통받는 모든 분들을 위해 두 손을 모은다. 잊었고 무디어진 우리 마음을 용서해 달라고. 다시 직면하고 그날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내가 있는 자리에서 무엇을 할지 생각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