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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garden Aug 14. 2019

고유정과 여우누이

동화의 잔혹함은 현재 진행형


동화책 여우누이를 아이에게 읽어주고 있었다. 이런 책이 동화책이라니. 잔혹해도 너무 잔혹하다. 삽화도 무시무시하다. 누이의 입은 신랄하게 올라가 있고 손은 무섭게 뻗어 나와 주변 공기를 다 삼킬 자세다. 일곱 마리 양을 삼킨 늑대의 배를 가르고 배 속 가득 돌을 집어넣어 우물 속으로 떨어져 죽게 한 엄마 양의 이야기를 읽어주다가 남편도 한마디 했다. "애들 책인데 조금 잔인하."



으슥하고 소름돋고 질퍽한 동화책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그 느낌이란!



동화는 왜 잔혹할까



실제로 벌어졌던 괴기스러운 일을 각색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법에 걸린 '잠자는 숲 속의 공주' 이야기는 마법에 걸린 공주가 왕자의 키스에 깨어나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답니다'의 이야기가 아니다. 원래그런 내용이 아니었다(참고문헌 1). 공주가 잠든 사이, 그곳을 지나가던 왕이 공주의 미모에 반해 겁탈을 하고 공주는 아이를 갖고 둥이를 낳게 된다. 공주의 존재를 알게 된 왕비는 아이들을 삶고 요리한다는 이야기. 타락한 세상에 대한 경계심을 심어주는 이야기였을 터. 디즈니사의 공주님은 아이들에게 환상을 심어주지만 현실의 공주님은 독살당하거나 요절했거나 불행했거나다.


참고문헌 1. 내 아이를 위한 칼 비테 교육법 (차이정원, 이지성 저)


삶에서 마주하는 동화 이야기


고유정 사건을 뉴스로 접했는데 그 잔혹함이 여우누이와 '잠자는 숲 속의 공주'에 등장하는 왕비가 떠올랐다. 여우누이는 누구였나. 남자아이만 줄줄이 셋인 부잣집. 부부는 오매불망 여자아이 갖기를 기도했다. "여우 같아도 좋으니 딸 하나만 더 주십시오." 그들의 바람은 현실이 되었다. 부부는 '우쭈쭈 우리 딸'의 양육방식으로 그 아이를 키운다. (사실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아이의 기를 죽인다며 공공예절이나 기본적인 바른 습관을 가르치기를 꺼려한다. 도대체 아이의 기, 그게 무엇이기에 소중한 가치들을 마다한단 말인가.) 그런 양육방식 아래에서 자란 누이는 집안 가축을 한 마리 두 마리 잡아먹기 시작하더니 누이를 의심한 첫째와 둘째 오라버니까지 죽이고 이를 목격한 셋째는 부모님께 사실을 말해보지만 누이를 편애하던 부모님 눈에 그게 보일 리가 없고 그는 도망을 간다. 시간이 흘러 집에 돌아와 보니 부모님까지 돌아가시고 없고 여우누이만 집에 남아있었다는 이야기다. (셋째 오빠와 여우누이의 싸움 이야기는 생하겠다.) 



본능을 거스르는 훈련


인간은 원래 탐욕스러운 존재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권력이나 돈을 가질수록 더욱 그러하고 그들에게 주어진 힘으로 인해 해볼까의 유혹은 넘쳐난다. 이쯤에서 가정교육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부모 맹목적인 낙관주의자되어서는 안된다.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선을 알아야 하고 선을 알기 위해서는 현실에 존재하는 악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분별할 줄 알게 되고 분별할 줄 알아야 올바르게 행할 수 있다. 분노 조절이나 사회 적응에 실패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온 세상에 넘쳐난다. 우리는 원래 분노 조절과 좋은 관계 맺기 등이 자연스럽지가 않다. 주 오랫동안 야만의 역사를 쓴 뒤, 민주국가들이 세워지고 시스템이 구축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 틀이 사라지면 우리는 다시 야만인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보장 없다. 본능을 거스르는 훈은 가정에서 시작되어야만 한다. 아이를 올바르게 교육으로 미력하나마 은 세상 만들기에 이바지할 수 있다. 누가 또 아는가,  교육받은 우리네 자녀가 마틴 루터 킹이 되어 노예해방운동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지.


잔혹사가 아닌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하는 챕터를 쓰자


이미지 출처: gettyimag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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