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오 Feb 13. 2022

건강하세요. 당신이라는 사람.


물론 저희는 최선을 다하겠지만 마음의 준비는 해두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며칠 전 퇴근시간 50분을 남겨두고 와이프에게서 전화가 왔다. 애엄마는 요 며칠 사이 체온이 올랐다 내렸다를 반복하며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코로나 검사를 받았는데 다행히 음성이 나왔고 약국 약으로는 안될 듯싶어 집 근처 병원에서 진찰을 받아보았다. 의사에게서 신장에 이상이 있으니 얼른 큰 병원으로 가라는 소견을 듣고 급하게 한림대병원 응급실로 향하는 중이라고 했다.


나는 하던 일을 접고 가방을 챙겨서 춘천으로 향했다. 가장 빨리 도착하는 전철이 ITX 보다 늦어서 용산에서 ITX를 타기로 했다. 결혼 후 20년을 넘게 서울과 춘천을 오가면서 가장 맘에 걸렸던 일 중의 하나가 둘째 놈 출산 때 옆에 있어주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에는 주말부부로 지냈고, 평일 오전 10시쯤 병원에 가야 할거 같다는 연락을 받고 바로 홍대에서 출발을 했는데, 시청도 채 지나기 전에 애가 나왔다는 전화를 받았다. 병원에 입원한 지 1시간 만이었다. 첫째 때는 거의 이틀을 꼬박 고생을 해서 이번에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예상과 달랐다. 어쩌다 보니 장인 장모님도 늦게 오셨다. 애를 낳고 한동안 혼자서 병실에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고 너무 미안해서 도착 후 조용히 찌그러져 있었던 기억이 난다. 와이프는 아직도 그 얘기를 할 때면 입꼬리는 올라가 있지만 눈은 가자미로 변신해 있다.


지금은 코로나로 인해 응급실 입장이 제한되어 있다고 한다. PCR 검사 후 음성일 때만 진료가 가능하다고 한다. 검사는 두 종류인데 조금 더 빠른 2시간 급행 PCR 검사를 받았다. 그리고 가족들은 대기실에서 기다려야 해서 일찍 와도 볼 수가 없기 때문에 입원 얘기가 나오기 전까지 집에서 대기하라고 했다.


남춘천역에 내려서 택시를 잡아타고 집에 도착했다. 두 아들들은 엄마의 상태를 듣지 못했나 보다. 한놈은 자기 방에서 게임 중이고, 한놈은 헬스장에서 운동 중이라고 했다. 이럴 때면 가끔 딸이 하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아주 살짝. 너무 오래 생각하면 되려 아이들한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바니와 잔디의 저녁을 챙기고 집안 정리를 하고 있자니 9시쯤 다시 연락이 왔다. 검사를 했는데 입원하는 게 좋겠다고 해서 짐을 싸서 택시 타고 오라는 얘기였다. 나는 주섬주섬 짐을 싸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무엇을 싸야 할지 고민 없이 바로 몸이 움직였다. 어려서 식구들이 병원에 자주 입원을 해서 그런지 입원실에서 필요한 물건들이 어떤 것들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속옷, 수면양말, 세면도구, 간단한 화장품, 생리대, 수건, 휴지, 물티슈, 슬리퍼, 생수, 음료수, 비닐봉지, 휴대폰 충전기, 얇은 이불 등등. 5분 만에 후다닥 챙겨서 집을 나섰다. 택시를 잡아타고 15분 만에 응급실 앞에 도착했다.


입원실은 자주 왔지만 응급실은 두세 번 정도 왔던 것 같다. 응급실 앞에 엠블런스가 2대가 와서 대기 중에 있었다. 아마 환자를 이송하고 대기 중인 걸로 보인다. 구급차 경광등이 소리 없이 깜빡이며 돌아가고 있었다. 두 손에 짐을 들고 안쪽으로 들어가니 흰 방호복을 입고 계신 분이 나와서 환자 가족이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고, QR코드와 온도를 잰 후 출입 장부에 연락처를 적었다.


입구에서 바로 우측에 방문객 대기실이 보였다. TV에서 나오는 뉴스 앵커의 목소리만 대기실을 메우고 있었다. 구석에 보이는 빈자리로 가서 짐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둘러보니 한 6팀 정도가 옹기종이 모여서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하거나 각자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바로 옆 테이블에는 젊은 부부가 두 아이와 함께 앉아 있었고 곧 의사 선생님으로 보이는 분이 나와서 아빠와 딸아이를 데려갔다. 남은 엄마와 사내아이는 말없이 TV를 응시하고 있었다.


뭘 해야 하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는 부모님 때문에 응급실이나 입원실을 왔었는데, 평생을 함께 살아야 할 와이프가 아파서 병원을 왔다는 사실에 잊고 있던 나이를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50. 와이프는 올해로 50살이다. 정초에 '이제 50이 되었네... 세월 참.... '.  대학교 1학년 스물에 만나서 30년이 흐른 것이다. 혼자 산 날보다 함께 의지하며 산 날이 더 많다는 것이 여기 이 자리에서 굳이 떠오른 이유가 있겠지.


휴대폰으로 포털 앱을 들어가서 이것저것 기사를 검색했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냥 기다릴 뿐이다. 가끔 와이프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해?', '검사 기다리는 중', '뭐해?', '검사하고 왔어', '뭐해?', '항생제 맞고 있어', 뭐해, 뭐해, 뭐해. 가끔씩 의사나 간호사가 나와서 가족들과 이야기를 하고 진행상황을 설명하고 돌아갔다. 그들도 기다릴 뿐이다. 그때였다.


"관계가 어떻게 되시나요?"

"남편인데요?"

"지금 어머님께서 호흡이 매우 불안정하십니다."


고개를 들어 앞 테이블을 보았다. 검은 점퍼와 방한모를 깊게 눌러쓴 할아버지 한 분 앞에 흰 가운을 입은 180센티에 90킬로 정도 보이는 키 큰 사람이 서 있었다. 의사인 듯하다.


오늘 좀 더 지켜봐야 할 듯 하지만 어려울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물론 저희는 최선을 다하겠지만 마음의 준비는 해두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짧고 명료하고 건조했다.


설명을 마친 의사는 황급히 돌아서 응급실 문 안으로 사라졌다. 홀로 남겨진 할아버지는 잠깐 서 계시다가 느릿느릿 제자리에 앉으셨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이시고 휴대폰을 물끄러미 한참 보시다가 어디론가 전화를 거셨다. 통화 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다시 휴대폰을 들여다보셨다. 마스크를 쓰고 계셔서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으나 눈물을 보이시는 것 같진 않았다.


여든은 넘으신 걸로 보였다. 나와 비슷한 나이에 부부의 연을 맺으셨다면 적어도 60년을 함께 보내셨을 거라고 짐작된다. 60년 동안 함께 눈뜨고 함께 잠들던 배우자가 내일이면 세상에서 사리질 수 있다는 예언 아닌 예언을 들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10분 전에 통화한 와이프의 목소리가 다시 듣고 싶어서 휴대폰을 눌렀다. '잠깐 기다려봐'라고 하고 전화를 바로 끊었다. 잠시 뒤 응급실 문이 열리고 가방을 든 와이프가 나타났다. 안 본 지 채 15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무척 '반가운 사람'이 되어버렸다. 너무 반가운 사람.


다행히 와이프는 입원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응급실에서는 입원을 권고했지만 신장내과 의사 선생님이 오셔서  병은 항생제 맞는  외에는 별다른 치료법이 없고 춘천이니 통원치료를 하기로 얘기가 되었다. 주말 동안 약을 보고 월요일에 다시 검사하기로 했다.


싸온 짐을 챙겨서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나오면서 할아버지의 테이블을 지나쳤다. 여전히 휴대폰만 만지작 거리고 계셨고 숙이신 등은 더 굽어보였다. 급하게 응급실로 오느라 따뜻한 옷을 챙기지 못한 와이프가 춥다고 해서 입고 있던 패딩을 벗어서 입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할머니께서 고비를 넘기셔서 꼭 다시 건강을 되찾으셨기를 바란다. 50을 넘기다 보니 이제는 결혼식보다 장례식 소식이 더 자주 들려온다. 조금은 익숙해져야 할 나이지만 조금도 익숙해질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언젠가는 나나 집사람에게도 무조건 한 번은 찾아올 일이라는 생각에 먹먹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나 보다.


건강하세요. 당신이라는 사람.





- 미오 -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