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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Mar 11. 2023

나의 죽음은 누가 결정하는가

연명의료

운전을 하는데 옆에 있던 엄마가 뜬금없이 연명의료 이야기를 꺼냈다.


"요즘은 연명 의료에 대한 자기 의사를 밝히는 사인을 해야 한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니,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가진 엄마 지인 한 분이 요즘 그런 사인을 받으러 다니신단다. 그런 건 병원에서 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나의 물음에 요즘엔 미리 그런 서약을 해두어야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죽고 사는 문제는 누구도 결정할 수 없는 고유한 나의 문제이기에 정신이 멀쩡할 때 자기 의사를 밝혀두어야 한다면서 말이다. 슬며시 그 얘기를 아빠에게 전하니, 당장 그분 오시게 하라는 답이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한다.


"아빠가 왜? "


아빠는 여러 번의 수술 끝에 가까스로 살아남은 분이다.

우리 식구는 이런 아빠를 기인 내지는 초인이라고 생각한다.

믿기지 않겠지만 홀로 중국까지 가서 이식수술을 받았고, 어렵다는 암수술도 항암치료도 골골대며 끝까지 받아오신 분이다. 오직 살기 위해서 말이다. 


내가 보기엔 누구보다도 살고 싶어서, 그 좋아하던 술, 담배도 다 끊었고, 아침이면 어른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소소한 운동을 끈질기게 하고 있다. 언젠가부터는 평생 동안 유지했던 식성까지 바꾸어 지금은 거의 과일과 야채를 달고 사는 아빠. 그만큼 몸속의 노폐물을 빼내기 위해 노력 중인 아빠는 적어도 우리 가족들이 보기엔 기인이다. 

심지어 얼마 전엔 뿌연 눈을 갈아 끼우는 수술까지도 감행한, 지겹도록 병원을 다니는 아빠인데, 그런 아빠가 하신 말씀이라는 게


"어차피 죽을 건데 자식들 고생시키고 돈 들고 뭐 하러 생명을 연장해, 당장 그분 오시라고 해" 


였다니, 멀쩡히 내 두 귀로 듣고 있는 중인데도 믿기지 않았다.

아빠는 죽음을 어디 쉽게 여행이라도 간다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으니 말이다.


"아빠가 질문을 잘 못 이해한 거 아니야? 연명치료 반드시 해야 한다고, 그런 거 거부한다고 사인하러 오라는 거 아니야?


이런 나의 물음에도 엄마는 한사코 아니란다. 

그러면서 어떤 의미 인지 모를 웃음을 웃어 보인다.


"너네 아빠는 하여튼 대단하다. 초인이야."


그렇다. 아빠는 아무도 못 말리는 사람이다. 어디 '세상에 이런 일이'라도 취재 차 나온다면 두 손 들어 추천해 드리고 싶은 인물 말이다.

이런 이야기 끝에 엄마는 어떻게 하겠냐고 물어보니 엄마의 대답도 마찬가지다. 연명치료를 하지 않겠다는 것.


순간, 알 수 없는 미래의 어느 날, 어느 병실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며, 그 앞에서 숨을 쌕쌕 몰아쉬고 있을 아빠가 떠올랐다. 연명의료를 거부해 더 이상 치료해 줄 수 없는 아빠의 모습이. 그런 생각이 잠시 스치자 운전을 해야 하는 내 눈엔 물기가 가득 차 올랐다. 


생각하지 말자. 아직은 먼 미래야. 그리고 그런 건 병원에서 하는 거라고.

연명의료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 나는 연신 중얼거리며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외숙모가 오늘내일하신다고 갑자기 연락이 왔어. 항암 중인데 백혈구 수치가 안 올라와 치료를 못하고 있다는데, 언니는 연명치료를 받고 있는 건가?"


엄마는 어제 친척에게 소식을 들었다며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외숙모 이야기를 했다.

얼굴만 얼핏 기억날 뿐 전혀 맞닿은 조각이 없는 외삼촌, 그리고 그의 아내, 외숙모가 아프시구나. 오늘내일하시는구나. 그런 상황에서 연명치료는 어떤 의미일까. 연명치료를 받고는 계실까. 






늦은 아침, 엄마에게 연락이 왔다. 아이가 핸드폰을 쥐고 있어 몇 번의 시도에도 통화가 되지 않았다고.


"외숙모가 오늘 돌아가셨대"


그랬구나. 어제 이야기를 들었는데, 오늘 돌아가셨구나.

어떤 슬픔 같은 것이 차오르진 않았다. 어쩌면 어제 그 전화가 임종을 알리는 전화였나.

그저 모든 것이 순리대로 흐르는 듯했다. 

딱 하나의 의문은 있었다. 마지막까지 치료를 받으셨을까. 그것이 아니라면 치료를 거부하고 마지막까지 내 삶의 의사를 밝히셨을까. 


생명으로 태어난 이상 우리는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겠지. 그 마지막 순간이 온다면, 나는 어떤 자세가 될까.


설령 연명의료 사인을 했더라도 마지막 순간 마음이 바뀌어 나 좀 살려달라고, 치료 좀 해달라고 하진 않을까.

마지막 순간 힘이 없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죽음을 맞게 되진 않을까. 마지막 순간은 내가 결정한 대로 흘러갈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니 나는 아직 너무나 살고 싶은가 보다. 


그러나 문득 살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고 생각하던 아빠가 연명치료 거부 사인을 한다고 하니 어쩌면 아빠도 본인의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 건 아닌지. 아니, 본인의 생사는 본인이 결정하고 싶은 건 아닌지. 살아온 방식도 본인이 결정했던 것처럼 죽음도 본인이 결정하고 싶은 건 아닌지. 그렇기에 마지막이 될 자기 의사는 분명히 밝혀두려는 건 아닌지. 오늘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해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친다. 언제나 그렇듯 이런 생각 끝엔 촉촉한 습기가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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