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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Mar 27. 2023

3일 동안 씻지 않았다.

3일 동안 씻지 않았다.

계획된 것은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본능에 맡기다 보니 씻지 않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시작은 금요일 밤.

아,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샤워를 한 건 목요일 밤이었다.


하루라도 씻지 않은 날은 없었다. 

어렸을 때는 당연히 그런 날들이 차고 넘쳤겠지만 어른이라고 인식한 순간부터 씻지 않은 날은 거의 없다. 간혹 술을 왕창 마셔 화장을 지우지 않았던 날들은 거의 10년 전이 마지막인 듯하다. 더구나 아이를 세상에 내놓고 보니 안 씻는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하루의 일과가 되었다. 내 몸도 그랬고 내 몸에서 나온 아이의 몸도 내 것과 같이 다뤘다.


아이를 씻기면 자연스레 하루가 마감되었고 그 보송보송함은 곧잘 잠을 재워줬다.

이 꿀맛을 보고 나니 나는 도저히 씻지 않고는 잠들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동생이 놀러 오기로 한 금요일 밤.

아이는 미리 씻고 잘 준비를 했지만, 어쩐지 내 집도 아닌 엄마 거실에서 널브러진 나는 갑자기 이상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 귀찮아라... 그냥 오늘 하루는 샤워를 스킵해 볼까?

평소에는 보지도 않던 영화를 동생만 오면 밤새워 보는 이상한 습관이 있다.

한마디로 동생이 온다는 건 나에겐 일종의 일탈이다. 

엄마가 아닌 게으른 나에게로의 귀환.

그래 오늘 하루쯤은.

먹고 마시고 영화를 보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

양심은 있어서 이는 닦았다.



늘어지게 자고 일어난 다음 날도 역시 영화로 하루를 시작했다.

평상시엔 왜 안 보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난 좀 뭔가를 몰아서 하는 사람이다.

영화를 보니 하루가 훌쩍훌쩍 잘도 간다.


아무리 게을러도 양심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오랜만에 산책을 했다.

여전히 따라가기 힘든 동생의 파워워킹을 잰 발걸음으로 뛰다시피 따라가니 심장이 두근댄다.


아고 피곤하다.

현관문을 여니 훅하고 달려드는 훈기에 얼었던 몸이 흐물흐물 녹는 듯하다.

거실 이불에 벌러덩 몸을 눕히니 노곤노곤한 눈꺼풀이 내려오기 시작한다.


씻어라...

희미하게 들려오는 저 세 글자를 귀에 담으며 어느새 잠이 든다.



헉. 오늘도 안 씻었다. 

자정이 다 되어 눈을 뜨니 이틀째 안 씻고 있는 내가 더럽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한 번 안 씻으니 모든 게 귀찮다. 

십 년을 매일같이 씻었지만 단 한 번의 일탈만으로도 공든 탑은 무너질 수 있구나.

예의 상 이는 닦았다.(계속 강조하게 된다.)


모두 잠든 밤, 영화를 보고 또 본다.

영화를 못 본 귀신이 붙었나 하는 순간, 귀신같이 빔프로젝터가 고장 났다.

암전. 난 자야 한다. 그런데 머리가 몹시 가렵다. 내가 싫어지기 시작한다.



늘어지게 자고 일어난 아침. 속옷가지를 챙겨 화장실로 직행했다.

뜨끈한 물을 틀고 언제 했는지도 모를 샤워를 시작한다.

가려운 머리를 아무리 박박 문질러 봐도 가려움이 가시질 않는다.

세 번의 샴푸질을 하며 머리를 긁어냈다.

씻는 시간이 평소의 3배는 걸렸다. 

드디어 말끔해졌다.

더 이상 냄새가 나지 않는다.



동굴에 갇혀 10일 생존했다던 아이들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먹지도 자지도 못했을 아이들.

상상할 수 없는 10일의 시간 동안 아이들은 얼마나 머리가 가려웠을까.

굶었다면 먹지 못했음을 떠올렸겠지만, 3일 동안 씻지 않았던 나는 자연스레 머리 가려움이 떠오른다.

가끔 극한의 상황으로 자신을 몰아넣어보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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