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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Apr 17. 2023

넌 나의 슈퍼맨이야

나는 뚫어뻥이다.

내가 주로 하는 일은 다들 알다시피 막힌 변기를 뚫는 거다.

인간들이 하지 못하는 걸 내가 하고 있지. 물론 인간의 손을 빌리지 않으면 난 움직일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닿을 수는 있다. 이럴 때 쓰는 말이 상부상조 아닐까. 서로서로 돕는 사이.


요즘은 내 친구들이 많아졌다. 로켓처럼 발사되는 친구도 있다. 그 친구 능력은 정말 끝내준다. 몇 번의 펌프질로 압력을 가하면 로켓이 발사되는 속도로 변기 저 아래 구멍까지 뻥 뚫어주니까. 흠이 있다면 소리가 엄청 크다는 것과 만약 오래된 변기라면 실리콘으로 마감된 아랫부분이 압력으로 들썩일 수 있다는 것. 잘못하면 그쪽으로 물이 새어 나오기도 한다.


이 친구의 능력이 부럽긴 하지만 뭐, 사람들은 평범한 나를 좋아하긴 한다. 가격도 적당하고 그것에 비해 소리도 조용하고 웬만한 일은 거뜬하게 해내니까.


난 이렇게 인간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는데 가끔 그들에게 서운함을 느낄 때가 있다. 그들은 날 보는 것조차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 난 깨끗한데 그들은 날 마치 'ㄸ'보듯 한다. 이건 정말 기분이 상하는 일이다. 강조하지만 난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다. 




난 뚫어뻥 기술자다. 흔히들 맥가이버라고 부르지. 내가 못 뚫는 변기는 없다. 여러 펌프를 써봤지만 기본형이 최고다. 가성비 갑이다.


오늘도 변기가 막혔다. 도대체 몇 번째야. 휴지를 많이 쓰는 건가. 세탁실 구석에 세워두었던 뚫어뻥을 가져왔다. 으으으. 보고 싶지 않지만 내가 아니면 누가 하리. 또 한 번 뿍뿍 펌프질을 해본다. 퀄퀄퀄. 내려갔다. 으악. 퀄퀄퀄.


누가 만들었는지 참 잘 만들었다. 로켓발사되는 펌프를 써봤지만 그건 힘이 너무 들어간다. 잘못하면 변기가 박살 나기도 한다. 한 번의 경험이 있는 나는 이 기본형 뚫어뻥을 애용한다. 평상시엔 보고 싶지 않아 한쪽 구석에 숨겨두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필수품 중의 필수품이다.


오늘따라 제 할 일을 마친 뚫어뻥을 보니 괜스레 안쓰럽다는 생각이 든다. 세탁실 한쪽 구석 그늘진 곳에 멀뚱히 서있는 뚫어뻥. 예쁘지도 않아. 도저히 예뻐할 수 없지. 디자인이 별로잖아. 누구 하나 좋아해 주는 사람도 없어. 필요할 때만 급하게 찾는 뚫어뻥. 그런데도 싫은 내색 하나 없이 묵묵하게 자기 할 일 다 하는 뚫어뻥.


그런데 말이다. 뚫어뻥. 넌 예쁘진 않지만 난 네가 참 좋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당황한 순간에 너만큼 도움이 되는 존재는 없거든. 그 순간은 어떤 누구도 도움이 되지 않아. 오히려 도움을 준다는 모든 손길을 뿌리치고 말지. 그건 말이야.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장면이거든. 그런데 이상하게 너에겐 창피하지가 않아. 세상에 이런 관계가 또 있을까. 오늘따라 너 뚫어뻥이 몹시 고마운 날이다. 그늘진 곳에 세워놔서 미안해. 잠시 쉬고 있으렴. 오늘 처음 고백할게. 넌 나의 슈퍼맨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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