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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Apr 20. 2023

색연필

어렸을 적 나의 놀이는 '그림 그리기'였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하루에 두 시간 이상을 가만히 앉아 그림만 그렸다. 나의 도구는 세 가지였다. 연필과 종이, 그리고 고요함.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진공 상태의 방에 들어와 있는 듯했다. 다들 어디에 간 건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말 나 혼자 있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그 순간 나는 혼자였고 주위는 조용했다. 


그림의 대상은 하나같이 사람이었다. 어떤 여자. 누구라고 칭할 수 없었지만 끊임없이 어떤 여자를 그리고 있었다. 한 번은 같이 살고 있던 할머니를 그렸다. 무슨 생각에선지 할머니가 목욕탕에서 목욕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그려보는 나체라 조금은 창피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리고 싶었다. 목욕탕 의자에 앉아 때를 미는 할머니 모습, 처음 그려보는 누드를 숨죽여가며 그렸다. 



                                                                                        ⁕



어느 순간 아빠가 옆에 있었다. 뭘 그렸냐며 그림을 본 것 같은데 부끄러워 차마 보여주기 싫었다. 19금 영화를 보다 들키기라도 한 듯 죄책감이 밀려왔다.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죄책감이었다. 왜 나체를 그린 것이 죄책감을 준 거지? 나체라는 것은 태초부터 어떤 부끄러움이었을까. 


그 이후로도 약간의 민망함을 간직한 채,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다. 그건 내 유일한 놀이였다. 나 혼자만의 세상. 아무도 침범하지 않는 나만의 세상. 무채색 세상. 


연필로만 그림을 그리던 내가 어떻게 색연필을 알게 되었을까. 언젠가부터 색연필을 가지고 싶었다. 색연필과 스케치북. 항상 가지고 싶은 일순위는 그것이었다. 누군가에게 말해본 적이 있던가. 없었다. 난 그런 걸 말하는 어린이가 아니었다. 간절히 바라기는 했겠지만.


주위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내 눈앞엔 하얀 스케치북과 12색 지구색연필이 보인다. 누가 나에게 이걸?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선물, 그때까지 기억에도 없던 아빠가 나에게 건네준 물건. 색연필과 스케치북.


무관심하다고 생각했던 아빠가 어쩌면 나를 조용히 관찰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 멋대로 기억해 버리던 어린 기억은 그렇게나 편협한 걸지도. 기뻤다. 무지 기뻤겠지. 내 머릿속에 정확히 그 두 가지 물건이 찍혀 있는 걸 보면. 배경도 없는 곳에 색연필과 스케치북이 자리 잡고 있는 걸 보면. 그래서 난 색을 칠하고 놀았을까. 안타깝게도 다음 장면이 기억나지 않는다. 색을 칠했을 텐데. 내 기억엔 온통 무채색 연필그림만이 빼곡하다. 


무슨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걸까. 알 수 없었지만 색연필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뛰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세상에 태어나 가장 순수했던 바램. 가지고 싶은 것 하나 말하지 못했던 어린이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용기 하나였을텐데. 


가끔씩 화방에 가면 아직도 가슴이 뛴다. 화방 후미진 구석에 들어가면 언제나 그렇듯 색연필과 물감이 한가득이다. 필요치 않은 물건임에도 탐이 나 한동안 그 골목을 빠져나올 수 없다. 물감을 괜스레 이리저리 매만져보고 산더미 같은 마카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난 아직도 색연필에 굶주려 있는 걸까. 이 허기짐은 해결되지 않는 걸까. 


                                                                                     ⁕



지금 내 주위엔 색연필과 사인펜이 넘쳐난다. 아이가 한 학년을 마치면 미처 다 쓰지 못한 색연필이 하나 가득 쌓인다. 가지고 싶을 때는 애간장을 녹이던 것들이 이제야 내 곁으로 찾아온다. 이건 마치 짝사랑을 질리게 하고 난 후에 내 마음을 알아주는 첫사랑 같은 존재랄까. 처분하고 싶어도 어쩌지를 못한 채 열심히 쓰게 된다. 


그 옛날 쓰지 못했던 마음까지 담아 하나하나, 그 끝이 닳아 뻑뻑 소리를 내며 나오지 않는 순간까지, 그어댄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 비로소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때가 되면 '' 소리가 나게 던져버린다. 단 하나도 그냥 버리지 않는다. 마지막 순간까지 뻑뻑 그어 준다.


앞으로도 몇 년은 이런 패턴이 이어질 것 같다. 색연필이 쌓이지 않는 순간을 넘어 그 끝이 다 닳아버리는 날까지. 뻑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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