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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Jun 08. 2023

오디오북이 되었습니다

milli

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잠자리에서 오디오북을 들었다. 이런 습관이 4년 정도에 이르자 이제는 자려고 불을 끄는 순간 "엄마 틀어줘"라는 말을 발사한다. 한 때는 나도 이야기를 들으며 정신을 집중하다, 정신을 놓치면 잠자는 패턴이었으니 아이와 나의 잠은 오디오북이 재운 거나 다름없다. 문제는 공포이야기라는 것. 자다 깨서 공포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으면 정말 무섭다.


그렇다. 아이는 공포이야기를 좋아한다. 어느 날은 저승이야기에 소름이 돋기도 했고 또 어느 날은 태국 귀신 이야기에 화들짝 놀라, 아이가 자는 것이 확인되면 오디오를 바로 꺼버렸다. 한마디로 어두컴컴한 밤이 무서웠다.


그러던 아이가 어느 순간부터 좋아하는 작가의 시리즈물이 생기고 한 달에 14500원이나 결제를 하는 앱에서, 그것도 딱 한 권의 책만을 주야장천 들으며 잠들었다. 그 이야기는 내가 듣기에도 현실 초등학생들의 이야기라 흥미진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작가의 이야기와 문체가 너무 좋아 어느 순간 엄마인 내가 팬이 되었다. 그렇게 그 시리즈를 다 들었을 무렵. 나는 앱을 삭제했다.


아이는 오디오를 듣다 보면 어느 순간 코를 골며 자고 있다. 그러면 남은 건 내 차지. 마치 아이가 남긴 밥을 아까워 엄마가 먹듯, 어느새 나 혼자 어둠 속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다.


솔직히 돈이 아까웠다. 다른 이야기라도 좀 들을 것이지. 아이가 원하는 건 딱 그 작가의 그 책일 뿐, 다른 책은 거들떠보지 않는다. 성우들이 정성 들여 읽어주는 맛에 비싼 거라는 걸 아이는 알 턱이 없지 않은가. 어느 순간 무료 앱으로 아이를 살살 꾀어내 그 책을 잊게 만들었다.


그런데 또 도졌다. 아이의 생각은 한 시도 제자리에 가만있지 않는다. 엉덩이가 들썩이듯 정신세계도 5살로 갔다 현실로 왔다, 종잡을 수 없게 움직여댄다.


뜬금없이 얼마 전부터 또 그 책을 틀어달라고 징징대기 시작했다. "이미 몇 번씩이나 들었잖아!"라는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 오로지 그 책을 틀어달라. 당장 결재를 하라고 막무가내 떼를 쓴다. 아무리 구독료 이야기를 블라블라 얘기해도 통하지 않는다.


그래도 구독을 하지 않았다. 이유는 말했다시피 한 권의 책을 주야장천 듣기엔 구독료가 너무 아깝기 때문이다. 그럴 거면 시리즈를 세트로 구매하는 편이 더 싸다. 이미 일 년을 넘게 구독했으므로 세트 비용도 날아갔지만.


그러던 어젯밤, 책 구독 서비스 앱에서 아이가 원하는 작가의 책을 발견했다. 그러나 오디오서비스는 되지 않는 상황. 뜬금없이 아이가 말했다. 


"엄마가 읽어줘" 

"......"


나, 사실 잠자리 독서로 책을 읽어준 지 백만 년이다. 그것도 중간에 다시 해보려 했지만 아이의 끝없는 질문과 들석임에 하도 성질이 나서 읽기를 포기해 버렸다. 서로 각자의 책을 읽고 자자고 얘기했지만 아이는 그럴 때마다 졸리다는 투정을 부렸다. 그러던 아이가 나보고 읽어달라는 거다.


"어어... 그래" 떨떠름한 대답을 하고 어둠 속에 나란히 누워 아이가 콕 집어준 책을 열었다. 어둠 속에서 낭독을 해야 하는 상황.


"엄마, 틀어줘" 뭘 틀으라는 거냐. 난 오디오북이 아니야...


난생처음 어둠 속에 누워 낭독을 하기 시작했다. 수백 번을 들어 이미 다 아는 내용, 목소리 톤까지 따라 하라면 할 수도 있는 익숙함. 그런데 눈으로 글자를 보니 다르다. 처음 보는 책이다. 들었을 때와 눈으로 볼 때가 이토록 다른 느낌이라니. 속으론 놀랐으면서 애써 침착하게 별거 아니라는 듯 최대한 성우의 느낌으로 읽어준다.


의외로 아이가 잠들지 않는다. 한 챕터가 다 끝났는데도 살며시 앱을 빠져나오면 왜 안 읽냐고 투덜댄다. "어디까지 들었는데?" 옴마야. 정확히 내가 읽은 곳까지 대답을 한다. 응 알았어. 나는 다시 오디오북이 된다. "엄마, 오디오북하고 똑같아, 아니 더 재미있어. 엄마 오디오북이야?" "허허허" 그렇게 두 챕터를 읽고 아이의 숨소리를 들으니 그제야 잠이 들었다.


내가 읽어도 참 잘 읽었네. 어쩜 그렇게 흉내를 잘 냈을까. 혼자 자화자찬을 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재미있다. 의외로. 나도 이 책을 읽는 내내 즐기고 있었다. 아이의 요구로 시작했지만 동화작가님의 글을 낭독하며 혼자 '어머어머 이런 표현이' 하며 마치 처음 보는 글인 것 마냥 쭉쭉 빨아들였다. 두 챕터를 읽었는데도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오히려 눈이 말똥말똥해졌다.


결론

나는 오디오북에 당첨되었다. 아마 나는 매일 밤 어둠 속에서 전 시리즈를 낭독하고 있을 것이다. 말똥말똥...

이것은 한 달에 14500원을 절약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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