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Y는 무계획적인 인간이다. 하고 싶은 것은 많지만, 그래서 머릿속이 매우 복잡하지만 어쩐지 착착 계획을 세우는 것에는 매우 서툰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나 여행 계획을 못 세우는데, 이번 여름에는 어딜 가야지. 생각은 하면서도 숙소를 알아본다거나 표를 예매한다거나 하는 일에 있어 매우 게으르다. 그러다 보니 여행은 언제나 닥치면 하는 것, 뜬금없이 떠나는 것이 된 지 오래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내일 어딘가에 앉아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럴 확률은 매우 희박하지만.
지난 일요일 아침도 그랬다. 느지막이 시작되는 주말아침, 대충 아침을 챙기고는 멍하게 의자에 앉아 있던 AMY가 말을 꺼냈다.
"세종대왕릉 갈래?"
아이는 언제나 그렇듯 AMY의 의견에 대찬성이다. 일단 밖으로 나가는 것이 이 아이는 좋은 것이다. 혼자 놀기 지친 아이,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쏟아낼 곳이 마땅치 않은 아이, 그래서 게임을 좋아하는 아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AMY는 이 점에 있어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는 중이다
장마가 시작되었지만 게 중에는 해가 반짝하며 공기 중의 습기를 내뿜는 날이 있다. 그날이 딱 그런 날이었다. 이런 날 세종대왕릉에 간다는 것이 과연 잘 한 선택일지는 모르겠지만.
무계획의 여행이지만 에이미가 추구하는 여행은 진짜 여행이다. 여기서 진짜 여행의 의미는 자차 없이 내 힘으로 그곳을 찾아가는데 의미를 두는 여행을 말한다. 즉,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발로 걷는 여행이다. 여행이라기 보단 극기 훈련 같기도 한데, 몇 번 이런 여행을 해보니 고생스럽긴 해도 왠지 해냈다는 성취감을 주어 선호하게 된 여행법이다.
계획된 것이 아니기에 아무런 정보가 없다. 가야 할 곳이 있을 뿐이다. 맛집 정보는 당연히 없는데 주로 아이가 고른 식당으로 들어가 먹고 싶은 메뉴를 시킨다. 그날도 아이가 고른 분식집으로 들어가 각자 메뉴를 두 개씩 골랐다. 의외로 싸고 맛있다. 짜식. 탁월한 선택을 했다.
첫 번째 교통수단, 시원한 열차에 올라탄 AMY는 느긋하게 책을 편다. 이 때다 싶은 아이는 얼른 게임에 빠져든다. 기도가 통하기는 하는 걸까.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지만 더 이상 추궁하지 않는 AMY다.
세종대왕릉 역에 내려 시간표를 확인해 보니 한 시간 뒤에나 버스가 있단다. 준비가 안 되어 있으니 투덜거릴 마음은 없지만 밖은 후덥지근하고 작은 역사 안엔 앉아있을 곳이 없다. 아이는 벌써부터 힘들다며 바닥에 주저앉아 버린다. 에어컨바람에 냉한 기운이 감도는 바닥이 시원한 모양이다. 어느새 AMY도 아이 옆에 슬그머니 앉아 본다.
5분 정도가 지났을까. 흡사 노숙자 모자를 본듯한 표정의 관광안내소 직원이 사무실로 들어오라는 손짓을 한다. 들어오란다고 냉큼 들어가 한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는 모자다. 좀 전까진 얼굴도 모르던 사람들인데 어디서 본 사람처럼 느껴지는 이 묘한 기분은 무엇일까.
"곧 버스가 올 시간이에요. 여행 잘해요!"
"감사합니다! (합창)"
기다리던 버스를 타고 릉에 도착하니 걸어야 할 길이 구만리다. 이제부터가 진짜 극기훈련이다. 사방으로 푸른 천지를 보니 가슴은 트이는데 머리가 뜨겁다. 잘 못 왔구나. 물에 들어가도 시원치 않을 날씨에 2킬로는 족히 걸어야 하다니. 그래도 걷는다. AMY와 아이는 돌아나갈 구멍이 없다.
고행스럽지만 걷고 또 걷는다. 산티아고까지 가서도 걷는데 이 정도는 못 걸을 일이 없다. 저 멀리 릉이 보이기 시작하자 아이가 아는 척을 시작한다. 여기는 귀신이 걷는 길이라는 둥, 제가 아는 이야기를 AMY에게 자랑하기 바쁘다. 어쭈 제법이군. 세종대왕님 뚱뚱한 것만 기억하던 아이가 언제 이런 걸 알았을까.
숲길을 걷고 오르고 올라 드디어 세종대왕릉과 마주한다. 언제 더웠냐 싶게 시원한 숲바람이 한 차례 불어온다. 몇 백 년 동안 이 자리를 지키느라 이끼가 끼고 검게 바랜 석상을 바라본다. 그들의 보호를 받으며 그 안에 잠들어 있을 세종대왕님을 생각하니 영험한 기운이 느껴지며 뜬금없는 기도가 나온다.
"세종대왕님. 안녕하세요. 우리 아이 한글 좀 예쁘게 쓰게 해 주세요. 삐뚤삐뚤 말고 훈민정음체처럼 또박또박 쓸 수 있게 도와주세요. 비나이다 비나이다."
너도 기도해 볼래. 하는 나의 물음에 아이는 한 마디를 툭 던진다.
"세종대왕 BYE!"
짧은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버스가 오지 않아 더욱 고생스러웠지만, 더위에 지쳤는지 AMY도 아이도 더 이상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기억나니. 아이야. 너와 내가 5년 전에도 단 둘이 이곳에 죽을 둥 살 둥 하면서 왔었다는 걸. 그날은 하도 많이 걸어 너의 신발이 다 해지고 말았단다. AMY는 그날이 참 좋았는데 어쩐지 너의 기억 속엔 그날이 없더구나.
오늘은 너의 기억 속에 남게 되겠지. 덥다고 물 한 통을 네 몸에 다 쏟아붓고는 오줌 쌌다며 시원해하던 너의 하루를. 사실 AMY도 온몸에 물을 쏟아붓고 싶었어. 그렇지만 난 AMY니까 네 앞에서 차마 그럴 수는 없었지. 어른이 된다는 건 어찌 보면 좀 불편한 거구나.'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핥으니 짠 기운이 느껴졌다. 하루종일 푹푹 찌던 더위는 그렇게 고스란히 AMY의 입속에 남아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AMY는 후다닥 세면대로 달려가 몇 번이나 입안을 헹구어냈다. 그제야 짠 기운이 사라졌다. 에어컨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숲바람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