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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Jul 04. 2023

그 여름의 민들레

그 여름은 참 뜨거웠다. 배가 나와 특별히 할 일이라곤 없었는데, 아침에 눈을 뜨면 어둑한 저녁이 지나 깜깜한 밤이 될 때까지 나는 온전히 혼자였다. 무슨 일인지 티비도 보지 않았고 컴퓨터도 스마트폰도 없어 그야말로 아파트에 혼자 남겨진 자연인으로 고 있었다.


임신 6개월이 되니 배가 불룩 나오기 시작했다. 다행히 입덧은 없었지만 입맛도 없었다. 그래도 먹어야 했다. 생명을 뱃속에 넣고 있다는 건 그런 것이었나 보다. 생명을 살려야 하니 내 존재 따위의 안일함이란 잠시 미루어 두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


아침도 점심도 저녁도 매끼를 혼자 먹었다. 딱히 먹고 싶은 것은 없었는데 하필 이건 정말 하필이라고 밖엔 설명이 안되지만, 수박이 먹고 싶었다. 평소의 나는 수박을 거의 먹지 않는다. 무거워서 살 엄두가 안 나고, 자르는 데 수고로우며, 벽돌처럼 쌓이는 수박 껍질이 꽤나 번거롭기 때문이다. 다 먹고 나면 하나씩 바닥을 뒹굴고 있는 수박씨도 눈엣가시다.


그런데 그 여름엔 웬일인지 수박이 먹고 싶었다.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누가 제발 한 입만 주었으면 하는 상상까지 했으니까.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까짓 게 뭐라고 먹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았는지. 나는 특별한 간식 없이 매끼를 적당히 그저 뱃속의 아이가 살아갈 정도로만 먹었다.


그 당시 즐겨 듣는 곡이 하나 있었다. 여수밤바다. 이 노래만 들으면 가슴에 쌓인 응어리가 밤바다에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들어 홀가분했다. 이렇게 혼자 어슬렁 거리는 나의 발걸음이 어쩌면 여수밤바다를 걷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상상을 하며 아파트 이곳저곳을 슬렁슬렁 돌아다녔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한가로이 아파트를 거닐고 있는데 그날따라 화단에 피어있는 민들레가 눈에 들어왔다. 가만히 쪼그리고 앉아 한참을 쳐다보니 아기 손바닥만 한 그것들이 무척 탐스러워 보였다. 그러다 문득 이것들을 따먹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누가 보았던가.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민들레 몇 줄기를 열심히 뽑았다. 그곳이 아파트 화단이라는 것도 잊은 채 야들야들한 것으로만 몇 줄기를 비닐백에 담아와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었다. 이 잎사귀들을 먹을 수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얼마 안 되던 여남은 에 살짝 양념을 해 민들레 무침을 만들었다.


생전처음 무쳐 보는 나물이라 그 방법이 맞는 건지도 몰랐다. 그것을 입안에 넣어 본 맛은 음. 쌉싸름하고도 푸릇푸릇한 맛이었다. 특히 그 쌉싸름한 향이 입안에 퍼지는 게 좋았다. 누군가는 그런 건 먹으면 안 된다고 말할지도 몰랐다. 매연이 베어 임산부가 먹기엔 몸에 안 좋다고 말할지도.


그러나 그날 내가 맛본 것은 민들레의 쌉싸름한 이야기였다. 그것을 얼른 뱃속에 넣으니 달콤한 수박 맛을 그만 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날 이후 신기하게도 수박 생각이 좀 덜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여름이면 수박을 제일 먼저 찾는 아이가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수박을 잘 먹지 않는다. 매해 여름 수박을 잘라 한 접시 가득 내놓고 나면 가끔 그날 먹었던 민들레가 떠오른다. 그리고 자연스레 내 귓가엔 여수밤바다가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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