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순둥이였다. 잠을 안 자고 운다거나 분유나 이유식을 안 먹어 속상하게 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아이의 어린 시절은 나에겐 태평천하였다. 뱃속에 아이가 있을 땐 덥기도 하고 심심하기도 해서 아이가 빨리 태어나 같이 놀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그대로 적중했다.
아이를 살뜰히 씻기고 입히고 먹이는 게 좋았다. 깨끗하게 씻겨 놓은 아이가 뽀송뽀송한 기저귀와 옷을 입고 곤히 잠든 모습만 바라봐도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그때가 호시절이었다.
1학년이 되었지만 코로나로 입학조차 못하고 집에만 있게 되자, 만사 태평하게 지냈던 지난날들이 꿈처럼 여겨졌다. 그 맘 때쯤 이런저런 정보가 하나씩 귀에 들어왔다. 급기야 겨우 한글을 떠듬거리는 아이에게 바라는 게 생기기 시작했다.
아이가 영어를 잘했으면 좋겠다.
3-4살부터 영어음원과 동영상을 보여줬다는 엄마들이 얼마나 많은 것인지. 밖에도 못 나가는 처지에 미지의 대륙을 횡단하는 아이를 꿈꾸며 영어동영상이란 세계로 아이를 들이밀었다. 특별히 까다로운 구석이 없고 적응을 잘하는 아이는 까막눈에 까막귀여도 곧잘 영어동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오. 정말 놀랍다. 아이들은 역시 스펀지구나. 이 방법이구나.
그런데 오작동이 시작됐다.
아이는 4년째 영어동영상을 본다. 특별히 무얼 보라고 하지 않아도 저한테 맞는 것을 이것저것 찾아 잘 본다. 귀도 제법 열렸는지 아는 체도 종종 한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아이는 영어동영상이라는 핑계로 태블릿을 24시간 제 옆에 끼고 산다. 연산을 풀어도 태블릿이 말을 하고 화장실에 들어가도 태블릿이 말을 한다. 두고 본다.
교과목 학원을 다니지 않는 아이는 동영상 태블릿 학습도 한다. 2년간 꾸준히 해왔지만 하는 건지, 찍는 건지 보면 볼수록 알 수가 없다. 두고 본다.
아이에게 태블릿을 준 것은 나다. 그 세상이 아이의 귀를 열리게 할 거라 믿었고 또 믿었다. 어느 정도 귀를 열게 한 것은 맞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는 사이 순둥이 내 아이는 온 데 간데없다. 온갖 동영상에 물들어 짜증을 내는 아이가 내 앞에 있다. 이 또한 두고 본다.
영어라는 이유로, 학습이란 이유로 아이에게 내어준 태블릿이 어느새 아이를 오염시켰다. 뭐 그 정도는 당연한 거 아니냐고 생각도 해본다.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아이 눈을 가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다.
이틀 전 태블릿을 버렸다. 영어를 버린 것인가. 학습을 버린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결과적으론 소음을 내다 버렸다. 엄청난 울음 떼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내 태도가 꽤 단호했던지 아이는 그저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듯하다.
이틀 내내 아이와 내가 대화하는 것 이외에 그 어떤 소음이 들리지 않았다. 영어는 어떻게 하냐는 아이말에 그저 책을 읽으라는 말을 했다. 동영상은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아이는 어리둥절해했지만 이내 아무것도 찾지 않는다. 태블릿이 사라져 동영상 학습도 그만두게 되었다. 방학 전 단축수업에 들어간 아이에겐 갑자기 시간이 남아돌고 있다.
아이가 갑자기 색연필 케이스를 닦는다. 스케치북을 들고 와 오리고 붙이더니 좋아하는 칼을 만들고 휘두른다. 태블릿이 사라진 집안엔 그 옛날 순둥이가 돌아와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AMY는 너를 믿을 것이다.
AMY는 너를 바꾸지 않을 것이다.
너는 네가 태어난 대로 살아갈 것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AMY의 결심이 무너지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