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이 취향입니다

by 이다

살림은 내 취향이다. 이런 말을 하면 누군가는 미쳤다고 하겠지만, 살림은 내 취향이 되.어.버.렸.다. 살림이라고 하면 언뜻 광범위해 보이나 내가 정의하는 살림은 눈에 보이는 걸 깨끗하게 청소하고 정리하고 아름답게 하는 것. 집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내 마음에 들도록 만드는 것이다.




9살 즈음 미술을 하고 싶었지만 엄마는 끝끝내 미술학원을 보내주지 않았다. 처음으로 뭔가 하고 싶다고 속마음을 내비쳤던 것 같은데 미술은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미술을 하면 가난하게 산다고 했다. 어린 마음에도 가난한 게 두려웠던 것일까. 미술학원 대신 다니게 된 곳은 웅변학원이었는데(지금의 트렌드엔 꽤 맞는 듯하지만) 워낙 숫기가 없던 난 "이 연사 외칩니다"를 몇 번 하다 학원을 그만두고 말았다. 지금 와 생각하면 미술학원 문이라도 열어볼 걸 하는 후회가 막심하다.


꿈을 차단당하고 나서 차선책으로 선택했던 것이 훗날의 스타일리스트다. 창의적인 일 좀 해보겠다고 문을 열고 들어갔지만 모든 일엔 바닥생활이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 바닥이란 정말 바닥을 완벽하게 정리하고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나에겐 실장님이 둘이었는데 그 둘은 키가 190이 넘는 장신남자들이었다.

그중 한 명인 영국남자 DR의 말에 의하면 본인은 청소 또라이, 다른 실장님은 정리 또라이라고 했다. 사무실이 없던 난 실장님의 집에 가서 일을 하기도 했는데, 먼지 한 톨 없는 남자의 집, 모든 물건에 각이 맞춰져 있는 집(영화 미저리에서 보았던 일렬로 늘어선 캔이 생각났다), 난 그곳에서 깨닫는다. 정리만이 살 길이다. 또라이 두 명 이랑 일하려면 나도 또라이가 되어야만 한다. 물건이 뒤죽박죽 되어 분실이라도 일어나면 이 일도 끝이다.라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촬영 결과물은 그럴듯했지만 과정은 언제나 비 오는 날의 흙탕물 같았다. 기본 100벌이 넘는 옷과 스무켤레 정도의 구두, 액세서리, 가방 등이 오전에 촬영장으로 도착한다. 그러면 이것들을 한쪽 테이블에 보기 좋게 정렬한다. 옷은 행거에 걸어 다림질을 한 뒤 스타일링을 시작한다. 이런 준비 시간을 매일 두 시간 정도 가진다. 나도 모르게 정리체력을 본격적으로 기르기 시작한다.


정리가 몸에 배는 사이 각종 전시를 하고 패션쇼를 하며 아름다운 것들을 끊임없이 눈에 담는다. 보여주는 일을 하는 나에겐 아름다움과 쿨함이 지상과제다. 잠시 스치는 그 무엇 하나에도 쿨내가 진동해야 한다. 구리면 바로 퇴출당한다.


5년 동안 옷을 접고 개고 펼치고 쌌다. 빡.센. 생활 후 늦은 나이에 결혼한 난 어느새 작은 또라이가 되어있었다. 일 할 땐 몰랐는데 그 당시 했던 모든 일들이 집안 일과 다름없다는 걸 결혼 후 깨달았다. 내가 그것을 꽤 좋아한다는 것도.


빨래를 하고 옷을 갠다. 갠 옷을 차곡차곡 정리한다. 걸어두는 옷은 체크하고 다림질을 한다. 신발장의 신발은 가지런하게, 수납장의 모든 물건도 가지런하게. 마지막으로 바닥엔 먼지 한 톨 없이. 집안 살림은 나에겐 촬영장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차이점 하나라면 밥을 해 먹는 정도랄까.


아이를 낳자 취향이 발산하기 시작했는데, '이럴 거면 인테리어를 전공할 걸' 후회할 정도로 가구를 움직여댔다. 왜냐고. 보기에 쿨하고 아름다워야 하니까. 내 눈은 어느새 그렇지 못한 것들을 거부하기 시작했으니까. 거기에 미니멀리즘이 기름을 들이부었으니까.


일주일에 한 번은 가구를 재배치했고 액자나 화분은 수시로 옮겼다. 남편은 집에 돌아오면 흠칫흠칫 놀랬다. 오늘도 바꿨냐고. 너무 맘에 든다고 좋아했다. 남편은 의외로 나의 이런 취향을 좋아했다. 깔끔한 걸 좋아하는 남자였다. 그거 하나는 잘 맞았다.


5년을 매일 같이 움직이니 어느 날 집에 들어온 남편이 그런 말을 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고. 집에 들어온 것 같지 않다고. 거기에 대한 나의 대답은 단호했다. "가구를 움직이지 않으면 난 죽은 거나 마찬가지야"


지치지 않고 매일 정리하며 인테리어를 새롭게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보기에 아름답게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아직도 남아있는 직업병일지 모른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에너지가 넘친다. 금방이라도 머릿속의 이미지를 눈으로 보고 싶다. 이런 생각이 한 번 떠오르면 영감을 주체하지 못하고 가구를 옮긴다. 이건 뭐 나 홀로 큐레이터가 따로 없다.


정체된 공간을 보면 답답한 마음이 든다. 묵은 먼지를 거둬낼 겸 또다시 가구를 옮긴다. 결과물을 보면 뿌듯하고 행복하다. 그리곤 사진을 찍는다.(이건 완전 직업병이다!)다행히 가구는 내가 옮길 수 있는 것들로만 구비한다. 움직일 수 있는 것이 가구의 제1원칙이다. 바라는 게 있다면 누가 나의 이런 영감 넘치는 노동력에 돈을 좀 줬으면 좋겠다. 안 되면 말고. 이건 내 취향이니까. 돈이 되지 않아도 기꺼이 움직이고 싶은 순수한 나의 취향.


지난날은 힘들었지만 나에게 확고한 취향과 영감을 선사해 준 두 분 실장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덕분에 저도 정리또라이가 되었습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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