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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Mar 09. 2023

엄마는 주린이

#1 현금 4000만 원을 들고

결혼을 마치자 슬아의 통장엔 1700만 원이 남았고 적금을 들었던 돈 4000만이 있었다.


초3 때 집안이 망했던 기억이 있던 슬아는 그때부터 돈을 잘 쓰지 않았다.

멀쩡한 빌라에서 방 두 칸짜리 지하실로 이사를 가던 날,

다니던 학교가 사립이라, 더 이상 학비를 내기 버거워 같은 지역 공립으로 전학을 가던 날,


그날 알았다.

가난해졌다는 걸.

배고프지 않아도 계속 허기가 진 느낌.

알 수 없는 위축. 뭔가가 계속 빠진 것만 같았다. 한 마디로 매사가 허했다.


필통에 남은 건 달랑 연필 한 자루.

네모나게 각이 졌던 파란색 연필, 전자시계 숫자 그림이 박혀 있던 파란 연필 한 자루가 슬아에게 남겨진 전부였다. 어쩐지 필통 안에서 달그락 소리를 내는 연필 한 자루가 자신인 것만 같아 학교 다니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그 시절 슬아의 놀이는 가지고 싶은 마론인형을 쇼윈도 너머로 구경하며 상상 인형놀이를 하는 것이었다.

언젠가는 가질 날을 꿈꾸게 하는 그림의 떡. 마론인형.

인형의 2층집이 부러워 한참을 유리창 너머로 들여다보는 오후 시간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때가 참 힘들었긴 한가보다.

아직도 눈에 선한 걸 보면.

다행히도 중학교 이후 집안 형편이 조금씩 피어났다.


그런 거다 돈이란.

있다가도 없고 돌고 도는 것.

아직 그녀에게 돌아온 건 없지만 지금까지 살아보니 그렇더라.

가까이 엄마인생만 봐도.


참 가난하고 지루한 시절이었다.


"돈에 연연하지 마라. 돈은 사람을 따라온다" 라는 말을 엄마에게 늘 들으며 자랐다.

그래서 그런지 슬아는 돈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 만큼 무식하게 일했고 열정하나면 통과였다. 결혼하기 전까지 말이다.


뭐, 결혼하고도 금방 달라진 건 아니다.

결혼을 한 건지 먹으려고 같이 살게 된 건지 부부는 저녁마다 외식을 하곤 했다.

딱히 돈 들어가는 곳이 없었기에 장 보는 대신 외식이라는 핑계를 대며 참 많이도 사 먹었다.


그러다 아이가 덜컥 생기자, 갑자기 없던 돈이 궁해진 걸까. 드디어 세상물정에 눈 뜬 여인이 된 걸까.

알 수 없는 불안함이 밀려왔다. 그때 문득 잊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파란 연필 한 자루.


아이 필통에 한 자루 연필만을 넣어주고 싶지 않다.

유리창 앞에서 상상놀이만을 시키고 싶지 않다.


'난 무얼 할 수 있지?'


그때, 수중에서 잠자던 돈 4000만 원이 불현듯 생각났다.

주식으로 큰돈을 벌었다는 삼촌도 생각났다.


'그래, 나도 해 볼 거야."


어느새 겁도 없이 4000만 원을 현금으로 몽땅 바꿔 버린 슬아는 벌벌 떨며 증권회사로 들어갔다.

부끄럽게도 현금 4000만 원을 내밀며 통장을 개설했고 그 자리에서 추천주를 덜컥 사버렸다.

아무것도 몰랐다. 주식의 주자도.

그저 돈을 벌고 싶었다.

눈앞에는 여전히 파란 연필 한 자루가 아른거렸다.


파란 연필, 이 작은 기억 하나가 그녀 앞길을 어떻게 바꿔 놓을지 알지도 못한 채,

슬아는 부자가 된 것 마냥 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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