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사랑에 빠지고 만다

by 이다

나는 어떤 남자를 좋아할까.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이성 취향에 대해 얘기해보고 싶다. 과연 할 말이 많은 주제일까. 의외로 할 말이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2000자를 채워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남자 이야기를 시작해 본다. (이러면서 글자 수를 은근히 늘린다)


내 기억 속 모든 남자들의 특징은 아주 명확하다. 이 정도면 대단히 특화된 취향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첫눈에 반한다는 것이다. 이 점이 정말 마음에 안 들지만 말투, 생김새, 부드러움, 세심함, 지적 수준 그런 것에 전혀 관계없이 그 사람을 응시한 지 7초 정도가 되면 그야말로 반해버리고 만다. 이건 나에게 굉장히 취약한 점이다. 언제나 상대가 알아채기도 전에 나 혼자 먼저 마음을 주기 때문에 철저한 을의 입장에 서게 된다. 아무리 고치려 해도 안된다. 타고난 취향이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까지 드는 심각한 취향이다.


이런 취향은 실제의 인간과 티비 속 인간을 가리지 않는데 예를 들어 나의 첫사랑 장국영을 살펴보면 여실히 알 수 있다.


그날 저녁 시간, 난 티비를 보고 있었다. 분명 이선희 콘서트라고 알고 있었는데 순간 보라색 재킷을 입은 어떤 남자가 쿵쿵 북소리에 맞춰 노래를 시작했다. 워어어어 머 삼쏘이미... 내 귀엔 이렇게 들렸다. 워어어어 나나나나.... 어쩌고 저쩌고 무심수면. 둥둥둥 둥둥. 그날의 북소리, 저음으로 내리깔린 그의 음색, 좋아하지도 않던 짙은 보라색이 마법을 부린 순간이었다. 저 남자가 누구지. 난 한 순간 그에게 빠지고 말았다.


난생처음 받아보는 사랑의 공격이었다. 만질 수 있는 실체는 없었지만 보고 들을 수 있었다. 심지어 중국어를 몰랐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언어라도 따라 하고 말겠어.라는 생각이 앞섰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발음 나는 대로 중국어를 따라 적고 따라 불렀다. 장국영이라는 이름을 알고 중국영화를 독파했다. 보다 보니 주윤발, 유덕화가 줄줄이 나온다. 그러나 내 눈엔 오로지 장국영뿐이었다. 이 첫사랑은 지독하게도 오래갔다. 그리고 그의 자살로 열병은 마감되었다.


첫사랑이 지나가고 두 번째로 나를 공격한 사람은 중학교 미술 선생님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민망하지만 왜 나는 선생님에게 반했을까. 나이도 엄마뻘이었고 심지어 단발머리 남자였는데, 난 뭐가 그리 좋아 가슴이 두근거렸던 것일까. 사실 여기에도 별 이유는 없다. 어느 날 테니스 코트에서 보았던 구리 빛 피부의 단발머리 남자가 새하얀 테니스복을 입고 탕탕 소리를 내며 공을 받아치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던 것이 아닐까. 사람에게 반하는 순간은 이처럼 한 순간이다. 선생님을 향한 순진한 짝사랑도 근 3년 동안 계속되었다. 생각해 보니 한 번 빠져들면 기본 3년씩은 빠져있는 아주 고약한 취향이다.


다이어트에 쏙 빠져 먹는 것과 사투를 벌이던 고등학생 시절엔 아무 생각이 없었던 듯하고 그 시기를 무사히 넘기고 대학에 입학한 첫날, 하필 나는 한 남자를 보고야 만다. 그는 바로 같은 과의 선배, 학생회장이었다. 그가 단상 앞으로 걸어 들어오는 순간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이번엔 7초가 아니었다. 그를 눈에 담았던 1초 2초 3초. 난 그대로 무방비 상태에서 사랑에 푹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대학 생활 내내 이 짝사랑으로 엄청난 고통을 느끼게 된다. 그러고 보니 내가 사랑에 빠지면 이루어진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내가 좋아하던 남자들은 나에게 관심은 있었지만(장국영 빼고) 정작 연애를 해 본 적이 없었다. 한마디로 숙맥의 짝사랑이었다. 또는 플라토닉 러브던가.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너무 좋아 몸이 마구 그쪽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들었던 3명의 남자들. 그렇기에 지금도 생생히 기억에 남아있다. 아무런 이유 없이 그저 한눈에 반한다고 생각했었는데 글을 써 놓고 보니 나름의 취향이 발견된다.


첫째, 피부톤이다. 대체로 내가 한눈에 좋아했던 남자들은 모두 피부가 어두운 편이다.(일명 구릿빛) 둘째, 처음엔 몰랐지만(알 수 없었지만) 조금씩 그들을 알고 나면 대부분 말이 많기보다는 과묵한 편이었다. 고독해 보이는 철학자 스타일을 은연중에 좋아했던 것 같다. 그렇기에 다가가기 어려워 혼자 속으로만 끙끙 앓았던 것이 아닐까.


그렇게 힘든 짝사랑만 주야장천 하던 나는 인연을 만났는지 결혼은 하게 되었는데 그 또한 까무잡잡했다. 장국영과 비슷한 키와 몸매를 가진 소유자였다. 그러나 여러 번의 힘든 짝사랑으로 깨달은 것이 있었다. 최소한 밥 먹을 때 편하게 먹을 수 있는 사람과 결혼하자. 결국은 가슴의 두근거림보다는 밥 먹을 때 불편함이 없는 사람이 좋았다. 내 취향이라고 모두 가질 수 없는 것, 그게 바로 이성과의 관계였다.


두근거림보다는 편안함을 선택한 나는, 취향은 포기했지만 적어도 밥은 잘 먹으며 살아가고 있다. 대신 가수 박효신과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는데, 어떤가요. 두 분 다 과묵하고 까무잡잡하지 않나요? 이렇게 보니 어째 사람 취향은 변하기 힘든 것 같다. 혹은 그렇게 태어났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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