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는 못 마셔도 와인은 좋아해

by 이다

술을 좋아하고 잘 마신다는 건 타고나는 것일까, 아니면 개인의 소소한 취향일까. 궁금했지만 알 수 없었던 나의 취향. 적어도 알코올 취향이란 어느 정도 나이가 들기 전엔 법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이므로. 그렇기 때문에 술의 세계를 알기 시작한 건 정확하게 대학입학과 때를 같이 한다.


처음 소주를 입에 부었던 날이 생각난다. 그 맑은 잔을 바라보며 드디어 저것을 내 입에 넣어야 하는 순간, 살짝 두려움 같은 것이 일었다. 저걸 마시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맞은편에서부터 맹렬하게 달려오는 소주 파도를 눈으로 좇으며 흐름에 끊기지 않게 단박에 소주를 입안에 털어 넣었고 뒤 이어 올라온 알코올향에 몸서리를 쳤다. 그것이 나와 소주의 첫 만남이다.


첫 잔이라 그랬나. 씁쓸한 맛은 별로였지만 그렇다고 몸에 이상이 나타난다거나 얼굴이 빨개진다거나 하지 않았다. 오호. 나는 아빠를 닮았나 보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대대로 술을 입에 못 대는 집안사람이라고 했다. 반면 아빠는 유별나게 소주를 몇 병이라도 들이켤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두 사람에게서 태어난 나는 과연 어떤 유전자를 물려받았을까 몹시 궁금하던 참이었다.


연거푸 3잔의 소주파도를 타고나니 뱃속이 찌르릉거렸다. 그래도 참을만했다. 컥컥 대는 알코올기운을 없애려고 안주를 입안에 넣었다. 그러고 나면 감쪽같이 알코올맛이 사라졌다. 그런 식으로 소주 한 병을 급하게 비우자 잠시 뒤 이상한 기운이 몰려왔다. 정신은 멀쩡한데 '뱃속에서 주먹이 입으로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우우욱. 그 거대한 기운을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간 나는 그만 모든 걸 쏟아내고 말았다.


정확히 그날부터다. 소주를 떠올리면 첫 잔은 맑고 투명하지만 마지막 장면은 뒤죽박죽 거나한 잔상만이 남게 되었다. 고로 아무리 마셔도 나는 소주와 친해질 수 없었다. 아니 그 '컥' 하는 알코올향이 코로 느껴지면 난 어김없이 말하곤 했다. "오늘은 술이 안 받는 날이야" 그리고 지금까지도 나의 소주 주량은 고작 3잔, 많이 마셔봐야 한 병이지만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소주를 못 마셔 대용으로 마시던 맥주, 그렇지만 본격적으로 맥주 맛을 알게 된 건 아이를 낳은 후가 아닌가 싶다. 임신으로 금주를 했고 아이를 낳고도 한 동안 몸 사리던 그때, 오랜만에 마셔 본 맥주는 천국의 맛이었다. 아이를 낳고 드디어 어른이라도 된 건지, 금주 후 처음 마셔본 맥주에선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알코올의 맛이 났다. 티브이 광고에서나 봤을 법한 그 따가운 목 넘김. '크으으으' 하는 후렴구가 내 입에서 뿜어져 나왔다. 이전에 마셨던 술들은 그저 술자리라 마신 것일 뿐, 진심으로 즐긴 술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맛을 알게 된 후, 아이를 재운 밤 혼자 마시는 맥주 한 캔엔 묘한 위로가 있었다. 하루의 답답함을 송두리째 풀어주는 '크으으으'가 있었다. '어머 이래서 사람들이 술을 마시나보다. 이래서 알코올 중독이 되는가 보다'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일명 노동주. 노동을 마치고 마시는 술은 막걸리든 소주든 맥주든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그 맛이 다 꿀맛일 수밖에. 특히 시원한 맥주는 탄산이 목구멍을 때려주는 순간, 고된 하루를 모두 잊게 만들었다.


매일 한 잔의 맥주를 마시면서도 쌓여가는 맥주 캔이 보기 싫었다. 내가 마시고 버려둔 것인데도 분리수거 때마다 짤랑거리는 소리를 내는 그것들이 못마땅했다. 아무리 노동주라 해도 아이가 보고 있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그럴 때쯤 와인을 한 병씩 사 오기 시작했다.


와인. 와인은 20대 후반부터 마시던 술이다. 스위트한 와인보다는 드라이한 와인을 좋아했다. 입안에 들어온 첫 모금이 부드럽게 혀를 감싸고, 뒤이어 텁텁한 기운으로 마무리되는 끝 맛이 좋았다. 거기에 치즈를 곁들여 주면 제대로 된 쿵짝쿵짝 컬래버레이션이 펼쳐진다. 그렇게 가끔 마시던 와인이었는데 맥주 대신 마시기 시작하면서 어느새 맥주를 대신하는 술이 되었다. 이번에 짝꿍을 이루게 된 것은 라면이었다. 꼬들꼬들한 라면 한 입과 와인 한 모금은. 아.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도는 환상의 조합이다.


그러고 보면 아빠를 닮았는지 술이 좋긴 한가보다. 과자만 먹던 내가 어른이 된 것일 수도 있고. (신기하게 과자를 더 이상 먹지 않는다) 결혼 선물로 집에 있던 양주를 몇 병씩 챙겨주던 엄마. 도대체 이런 걸 언제 마신다고 바리바리 싸주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 술들이 집에 없다. 어느 날부턴가 하이볼을 만들어 호로록 다 마셔버린 탓이다. 이쯤 되면 나는 술을 좋아합니다.라고 인정하고 고백한다.


<나의 알코올 취향>

라거 맥주의 깔끔함과 탄산을 좋아하지만 에일맥주의 씁쓸하고 깊은 맛이 더 좋다.

와인의 달콤함보단 드라이한 묵직함이 좋다.

대학 내내 소주를 마셔왔지만 이건 정말 내 취향이 아니다.

그러나 요즘 유행하는 소주 하이볼로 소주를 다시 보게 되었다.

요즘 위스키가 자꾸 눈에 들어온다.

편의점사장님과 친해졌는데 자꾸 추천을 하신다.

사장님은 위스키를 드신단다.

급기야 위스키책을 읽다 한 병을 사서 마셔봤는데 너무 좋았다.

점점 더 독한 술에 입맛이 당긴다. (으악)


아이를 낳고 노동주로 시작된 한 잔의 술. 이쯤 되면 중독자인가. 굳이 중독자라고 한다면 한 잔의 중독자다. 이렇게 조금씩만 마시는 이유는 오래 길게 마시고 싶어서다. 일본 영화를 보면 회사원들이 퇴근하며 맥주 한잔을 마시는 장면이 꼭 있던데, 나도 한 잔씩만 마시며 오래도록 마시고 싶은 소망이 있다. 알코올은 어쩔 수 없이 기분을 좋게 만드는 특급 취향이니까. 그 취향을 오래도록 빼앗기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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