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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Dec 18. 2023

바람난 여자

un cafe'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순간 커피가 생각났다. 왜 갑자기 커피가 생각나는 거지. 아침이구나. 아침이어서 커피가 생각났구나. 생각이란 이렇게 부지불식간에 내 머릿속을 파고든다. 제 아무리 철벽을 치고 있다 하더라도.


25살부터 본격적으로 커피를 마셨다. 물론 그전에도 마셨을 것이다. 아침이면 길쭉하고 노란 봉지를 쭉 찢어 하얀 가루를 잔에 붓고 보글보글 끓는 물을 따라 티스푼으로 몇 바퀴 휘휘 저으면 달달하고 고소한 갈색의 액체가 되었다. 그것이 나에겐 커피였다.


27살부터 마신 커피는 좀 달랐다. 검은 진액이 작은 잔에 쏟아졌다. 그냥은 마실 수 없어 갈색 설탕을 한 봉지 넣어야만 달고나 비슷한 맛으로 마실 수 있었다. 설탕은 꼭 갈색으로. 그래야만 달달한 죄책감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지독하게 쓴 에스프레소를 마신다고 했다. 정말 이렇게 쓴 걸 마신다고. 믿을 수 없었지만 눈에 보이는 걸 외면할 수는 없었다. 알고 보니 갈색설탕이 하나도 아니고 두 개씩이나 퐁당 빠져있었지만.


단맛이 커피는 아니잖아. 커피 맛을 알고 싶어. 아침이면 습관처럼 모카포트로 커피를 내려 작은 잔에 마시기 시작했다. 설탕을 넣지 않은 진한 엑기스가 목을 타고 꿀떡꿀떡 넘어간다. 작은 잔이니 만큼 한 번에 들이붓지 않는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잘게 나누어 입안에서 침과 섞어준다. 그 순간 혀가 커피 맛을 음미한다. 쓰지만 고소하다. 목구멍으로 넘어가기 전 특유의 달짝지근한 맛을 남긴다. 그 맛이 느껴지면 다시 한 모금을 입안에 머금는다. 아주 천천히. 이렇게 하더라도 작은 잔이니까 다 마시는 데는 채 몇 분이 걸리지 않는다.


다 마신 에스프레소 잔에는 작은 구멍을 따라 내려온 커피가루가 살포시 남아있다. 커피 가루는 마셔도 되는 건가. 마시기엔 까끌까끌한가.

커피를 마실 수 없게 된 나는 커피만 생각하면 사랑하면 안 되는 애인을 생각하는 마음이 된다. 자꾸 생각이 나는데 의식적으로 머릿속에서 밀어낸다. 그러다 오늘처럼 참을 수 없는 날에는 슬며시 밖으로 나간다. 찬 바람이 몰아쳐도 커피를 향해 달려가는 발걸음엔 바람난 여자의 흥분이 묻어난다. 커피를 주문하는 내 앞엔 에스프레소가 가물거리지만 조금이라도 죄책감을 덜어주는 라떼를 주문한다. 과거의 나에게 라떼는 커피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이것만으로도 감사하다. 라떼 한 잔으로 잠깐은 견딜 힘이 생긴다. 오랜만에 마시는 커피는 천천히 마신다. 차가워져도 좋다. 이 시간을 최대한 질질 끌고 싶다. 한 시간 정도가 지나야 커피잔은 바닥을 드러낸다.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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