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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Nov 28. 2022

장희빈과 인현왕후

사극을 좋아하게 된 이유

중전마마의 저고리인 당의가 좋았다.

머리 위에 높이 올라가 있는 가채도 멋스러웠다.

마마님들만이 머리에 장식했다던 머리 떨잠도 내 눈을 사로잡았다.

그 무거운 가채가 머리와는 분리된 장식이라는 걸 안 것은 나중이었다.


처음 사극을 보던 날 나는 한복의 매력에 아니 사극의 매력에 푹 빠졌다.

이런 매력에 푹 빠지게 한 이가 있었으니

그 인물은 바로 허준도 장금이도 아닌 장희빈.


어느 여름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방학이라 친척 집에 모두 모여 장희빈이라는 드라마를 처음 보게 된 날이었다.

모두가 장희빈에만 집중했다. 당연했다 그녀가 주인공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주인공인 장희빈이 얄미웠다. 인현왕후가 가여웠고 마음이 쓰였다.

그렇다고 장희빈이 마냥 싫은 것만은 아니었다.

당대의 내로라하는 배우가 장희빈 역을 맡았기 때문에 언제나 장희빈이 극 중에서 가장 돋보였다.






그때부터였을까. 유독 마마님들의 곱디고운 한복에 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초딩시절 내내 내 그림의 주제는 한복을 입은 여인이 되었다.

지금 와 생각하니 난 좀 이상한 아이였던 것 같다.

매번 쉬는 시간 종이 울리종이를 꺼내 한복을 입은 마마님을 그렸다.

저고리며 치맛단에 금박 은박을 세밀하게 표현했고 알지도 못하는 한자를 그림처럼 그려 넣었다.

그리곤 내심 뿌듯해했다.

그림을 그리는 내내 머릿속에 상상의 사극이 돌아가고 있었다.

나 혼자 만들어가는 장희빈과 인현왕후 번외 편.

한 올 한 올 한복을 그려가며 내가 인현왕후가 된 듯 장희빈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해줬다.

숙종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한을 상상 속 사극에선 통쾌하게 복수해 주기도 했다.


아직도 가끔 그린다 ^^



대학 수학능력 시험을 마치고 대학 원서를 쓰던 그때, 문과였던 나는 한 대학의 사학과에 원서를 넣었다.

초조하게 면접을 기다리다 교수님과 첫  했다.

내 생애 최초의 면접.

교수님이 물으셨다. 가장 존경하는 역사적 인물이 누구인지.

역사적 인물, 역사적 인물...

그 순간 입을 틀어막을 새도 없이 갑자기 튀어나온 이름은. 다름 아닌 인현왕후였다.

아차 싶었다. 망했다. 그러나 되돌릴 수가 없다.


뭐라고 혼자 한참을 지껄인 것 같은데 그 내용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대략 이런 내용이지 않을까.

'교수님 제 머릿속이 항상 장희빈과 인현왕후로 꽉 차 있어서 지금 이 순간, 이 중요한 순간에 제가 연민했던 인현왕후밖에 떠오르질 않습니다'

나머지 대화는 상상에 맡긴다.




보기 좋게 떨어졌다. 그래도 싸다. 그러나 후회하진 않았다.

덕분에 역사에 흥미가 생겼고 조선시대 왕이며 그 역사 속을 훤히 꿸 수 있게 되었으니 그것으로 만족다.

단지 중요한 대학 입시 면접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는 게 지금 와 생각하면 한 편의 코믹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교수님도 이 황당한 면접을 기억하실까.


지금은 그마저도 한물간 역사 속 인물이 되었는지 더 이상은 장희빈 시리즈가 나오지 않는다.

나 또한 더 이상 퓨전 사극에는 동요하지 않는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나를 사극 속으로 풍덩 빠뜨린 장희빈.

희빈의 품계에서 시기심과 질투와 욕망으로 결국은 중전의 자리를 꽤찬 여인.

그리고 끝끝내 화염 속으로 스스로 빨려 들어간 여인 장희빈.

사약을 꿀떡꿀떡 마시는 장면이 궁금해서 마지막 회를 초조하게 기다리며 본방 사수하게 했던 장희빈.

역사의 진실은 뒤로하더라도 나에게 영감을 준 여인.

그립다 장희빈.


티비를 거의 안 보는 요즘, 눈에 들어오는 사극이 한편 생겼다.

잠깐 지나가는 장면을 보니 김혜수 배우가 중전마마로 나오나 보다.

오랜만에 중전마마를 티비로 다시 보니 가슴이 두근 거다.

슬며시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 볼까.

괜히 웃음이 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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