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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콜과 구공탄 Jul 23. 2022

그냥

사람, 그냥, 그리고 소통

정말이야 처음엔 그냥 걸었어 
비도 오고 기분도 그렇고 해서 
정말이야 거짓말이 아냐 
미안해 너희 집 앞이야

                                                  임종환의 <처음엔 그냥 걸었어(1994)> 중에서


 just. 영어권 국가에서 정말 많이 쓰는 단어다. 여러 뜻이 있지만, ‘의로운’이란 형용사나 ‘막, 방금’이라는 부사의 의미보다는 그냥 (한국인 어감대로 직역해서) ‘그냥’이라는 뜻으로 쓰거나 (의미가 없지는 않겠지만) 한국말 ‘어...’, ‘그러니까’ 같이 앞서 하던 말에 말 그대로 ‘그냥’ 붙여서 쓰는 게 just다. just를 쓰지 않은 말과 쓴 말 사이에 어감 차이는 분명 존재하지만, 의미의 차이는 크게 와 닿지 않는다. 중1이 되어서야 알파벳을 매 맞아가며 배웠던 나에게 just는 빨간 기본 영어, 맨투맨, 성문으로 공부할 때, ‘그냥’ just였고, 그 후 심화(?) 수준으로 들어가 분사 파트를 배우면서 ‘방금, 막’ 정도의 뜻으로 외웠던 기억이 남아있다. ‘의로운’의 뜻은 대학교나 들어가서 들었던 것 같다.(아, 지금 보니 ‘justice’와 앞 글자가 똑같구나... 헉...ㅜㅜ)


 그냥. 한국인은 언제 이 말을 쓸까? 혼자만의 정의를 내려보자면... '대답해야 하는 것에 대해 딱히 근거를 대기 애매하거나 자세하게 설명하기 귀찮거나, 아니면 뭔가 의도를 표현하기에는 준비가 덜 되었거나 피하고 싶을 때 무의식적으로 집어넣는 머뭇거림'... 이라고 하면 '그냥'을 너무 그냥 설명한 걸까?  


 넌 글을 왜 쓰니?... / 나? 그냥 쓰는데.(훅 들어와서 설명의 준비가 안 됨)

 그 옷이 맘에 든 거야? / 글쎄. 뭐 그냥 눈에 들어오길래.(근거가 애매함) 

 살면서 김밥 첨 만들었어. 너 주려고^^ 맛이 어때? / 그냥 먹을만하네.(자세한 설명 귀찮음)

 어제 헤어지자고 해놓고선 왜 전화한 거야?! / 뭐 그냥 했다. 왜? 헤어지면 전화도 못 하냐?(의도가 들킬까 사전 방지 차원) 


 한국인에게 영단어 just의 사전적 의미를 가르쳐주고 실제 영어 회화 중에 쓰인 just를 들려주면, 뭔 말이지?라는 강한 의문과 함께 확 와 닿지 않는 것처럼, ‘그냥’이란 말도 외국인에게 국어사전 펼쳐놓고 설명해도, 막상 실제 한국어 대화에서 쓰인 ‘그냥’을 들려주면 이게 그게 맞나 싶은 답답함만 남는다. 


 첫 부분에 인용한 가사는 가수 임종환이 1994년에 발표한 ‘처음엔 그냥 걸었어’라는 가요의 후렴이다. 발라드 아니면 댄스라는 당시 가요계 분위기에서 지금 돌아보면, 랩이라고 하기는 못 미치는 부분이 있고, 힙합이라고 하기에는 덜 힙하고, 오히려 히피스러운? 뭐 그런 느낌의 곡으로 기억한다. 그런데도, 꽤 인기가 있었다. 오늘 나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이 ‘그냥’에 문득 꽂혔다. 시적인 서정적 표현을 쓰거나 번안곡으로서 상당히 외쿡스러운 느낌이 강했던 여타 가요 제목들에 비해, ‘그냥’이라는 단어 하나로 매우 한쿡스러운 느낌을 툭하니 던져주었다. 작사가의 심정을 헤아려본다. 곡의 전체 분위기는 꽤나 찌질하다. 후렴 끝 부분이 일관된 두 가지 고백으로 나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미안해 너희 집 앞이야 난 너를 사랑해 우후후~

 나 그냥 갈까 워우워우어어~


 꽉 채워졌다. 우후후... 워우워우어어... 바야바도 아닌데, 말을 못 한다. 이때까지 한국 노래에서 외국처럼 (특정 정서가 느껴지지 않는) 알 수 없는 가사말(?)로 채워지는 것은 대중적인 방식이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작사가의 센스는 정말 찐!이다. 노래 속 주인공의 뭐라 말할 수 없는 심정, 용기는 안 나는데 보고는 싶은 남자의 그 마음. 그러다가, 어쩌다가, 그냥저냥 집 앞까지 걸어가버린 남자. 그것을 ‘그냥’과 ‘워우워우어어’ 두 개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지금 보니까 가사가 대박이구먼! 


 이런 '그냥'을 사람과의 관계에 비춰 생각해본다. 사람을 만나고, 대화하고, 즐겁고, 오해하고, 화해하고, 혹은 멀어지는 등의 이런저런 장면들이 반복되다 보면, 매번 그 교류들을 설명하기 힘든 뭔가들이 꼭 있기 마련이다.(between the lines이라고나 할까ㅎㅎ) 그런 미묘한 감정이나 사건들을 들춰낼 것인가? 아니면 잘 묻어두고 갈 것인가? 의 타이밍을 아는 것이야 말로 인간관계에 필요한 환상적인 센스라고 본다. 그런데, ‘너’와 지내면서 어찌 늘 그런 센스로 무장되어 있을 수 있나? (적어도 내겐) 불가능이다. 풀려고 들춰내면, 잘 풀리기도 하고, 반면에 또 다른 오해가 쌓이기도 한다. 또는, 묻어두고 가자니 내 안에 응어리가 쌓이거나 찝찝함이 남거나 해결되지 않은 문제에서 오는 하나의 도화선이 더 생기기도 하고, 더 이상의 문제없이 세월 속에서 잘 묻히기도 한다. 이렇게 관계가 복잡해질 기미주근깨가 보이면, 우리는 그냥 ‘그냥’을 쓴다. 


 제발 이번에는 그냥 좀 넘어가자. 
 그냥 그냥 살면 좀 어때? 항상 이렇게 일일이 따지고 살래?
 너는 무슨 일만 생기면 그냥 지나가잖아. 풀 건 풀고, 사과할 건 사과하고 가야지. 이렇게 어떻게 살아?


 솔직히 나는 일일이 따지고, 재보고, 생각해보고, 바로 잡고 가려는 스타일이다. 그런데, 그게 좋게 끝난 적이 별로 없었다. 어릴 때부터 삶을 진지하고, 심각하게 보는 것이 생활화된 나라서 그런지 ‘너’를 대할 때도 심각했다.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상급자 또는 선배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늘 대하기 어려웠다. 성격이 이렇게 생겨먹어서 그랬나? 나이가 많다고, 먼저 회사에 들어왔다고, 선배라고 내가 볼 때 그들이 하는 틀린 혹은 편견에 사로잡힌 말들과 생각을 그냥 ‘예예’하고 넘어가지 못 했다. 뭐라 들이댈 용기는 없고, 그래서 소심하게 저항한 경우가 약간, 대부분은 입 닫고 지냈다. 그게 윗사람(?)을 대하는 방식으로 굳어졌다. 상황에 따라서 ‘그냥’ 하고 넘어갔으면 좀 더 유연한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싶다가도, 아주 가끔씩 ‘그냥’이 안 돼서 유연한 사고(思考)가 아닌, 허걱 하는 사고(事故)를 쳤던 것 같다. 


 대학원 강의 시간이었다. 전공분야에서 대한민국 top 5 안에 드는 실력과 명예를 지닌 담당교수의 말에 아무도 말 못 하는, 마냥 적막만 흐르는 그 교수의 솔로 콘서트(?)에서 그의 말에 이의를 제기한 적이 있다. 드라마 대사처럼 ‘심장아 나대지 마’가 머리에는 울리는데, 그 순간 이미 나는 말하고 있었다. 내 주변에 숨 쉬는 사람은 다 어디로 간건가 싶을 정도로 고개만 R2D2처럼 돌린 체 나를 바라보는 수강생들을 느낄 수 있었고, 그렇게 공기도 숨을 못 쉬어서 죽었겠다 싶은 분위기에서 내 음성은 떨리는 그대로 전달되고 있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살짝 긴장된다. 하지만, ‘그냥’ 넘어가지 않아서 가장 좋았던, 내 인생 최고의 경험이자 도전(?)이었다. 이때부터 탄력을 받았는지 나는 인간관계 전반에서 이렇게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ㅜㅜ 그렇게 몇 년을 지나고 보니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가 공부를 해서 지인들과 너무 떨어진 탓도 있었지만,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너무 진지하거나 너무 거리를 두거나 하는 방식으로 사람을 사귀어 나갔던 것 같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사람을 떨궈냈다. 중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가족들 외에는 주변에 사람이 없다. 좀 더 ‘그냥’이라는 말로 넘어갔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에 헛웃음만 나온다. 


 다른 사람들은 언제 ‘그냥’이라는 말을 하고, 누구에게 ‘그냥’ 대하고, 어떤 상황 속에서 어떤 의도로 ‘그냥’의 태도를 취하는지 궁금하다. ‘그냥’이라는 말은 나를 잘 드러내 주는, 아주 다중이 같은 말이다. 안 쓰면 몰라도, 쓰려고 하면 이곳저곳 다 쓸 수 있는 다용도 칼처럼... 


 ‘그냥’은 회피의 언어이기도 하지만, 균형에 필요한 변화의 언어다. ‘그냥’을 적절히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될 텐데 큰일이다ㅎㅎ(2년여만에 다시 글을 꺼내 어색한 부분을 약간 손 보고 있는 지금도 이 큰일이다는 여전히 유효하다. 큰일이다...^^;;)


20200424 12:00 - 20220724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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