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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콜과 구공탄 Jul 29. 2022

오늘이 내일이다

사람, 외노자, 그리고 소통

 나는 외노자다. 외국인 노동자. 노동자라는 말의 어감은 (사전의 그것과는 달리) 서글프게도 몸 쓰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의 이미지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몸을 쓴다는 뜻이 내 건강을 내어주고 돈으로 바꿔 받는 것이라고 말하면 너무 극단적일까?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으로 방금 적은 나의 표현 또한 내 마음 한켠을 헛헛하게 만든다. 4차 산업혁명, 메타버스, OTT 플랫폼 등의 곧 다가올 미래사회를 표현하는 용어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을 전달하기도 한다.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딱 먹고 살 정도의, 혹은 그 언저리 어딘가에 딱 붙어 머무를 정도의 수입만을 벌어들이는 정도로 들린다. 그런데, 여기다가 그닥 반갑지 않은 ‘외국인’까지 붙는다. 나야 알파벳을 중학교 입학하고 배웠지만, 요즘이 어떤 시대인가? 영어유치원에는 혀를 내두를 정도로의 대기자들이 자신들의 자녀에게 영어라는 모터(인지 족쇄인지...)를 달아주려고 안달복달이다. 그렇게 12년을 넘게 영어 교육에 혈안이 되지만, 역시나 지나가는 외국인이 길을 물으면 못 들은 체 하고 지나가거나 어..어.. 왓? 왓? 쏘리로 일관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적지 않다. 그런데 외노자 신분의 외국인은 또 다른 차원에 살고 있음을 느낀다. 자신의 나라를 떠나 자신의 몸과 마음의 건강을 내주고 돈으로 바꿔 먹고 살 수 밖에 없는 헛헛한 인생들이기 때문이다. 다는 아니겠지 라며 고개를 젓다가 내가 처한 처지와 묘하게 겹치면서 이 시간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다. 집에 가고 싶다. 엄마 보고 싶다. 이젠 그 튼튼했던 허리가 굽어져버린 고목과 같은 아버지의 주름진 얼굴을 만져보고 싶다. 


 외노자로 해외에 살면서 종종 한국에서 지나쳤던 동남아 지역에서 온 노동자들이 떠오른다. 얼굴이야 기억 날리 만무하다. 그때는 그 사람들의 힘겨운 삶에 관심조차 없었다. 그저 개콘이나 드라마, 영화에서 희화화되어 나온 캐릭터 수준의 이해였을 뿐이지 싶다. 이곳에서 나도 그런 존재일까? 누구의 관심에도 들 수 없는 그런 존재. 나도, 상대도 서로에게 아무런 관심도, 눈길도 주지 않는, 굳이 그럴 필요도 못 느끼는 그런 사람. 괜히 과거 한국에서 마주 쳤던 해외노동자 분들에게 사죄하고 싶다. 당신들에게도 피치 못 할 사정이 있을텐데요... 당신들도 가족들이 너무 보고 싶은데도, 그들을 위해 그들과 떨어져 살아야 하는 아이러니한 삶을 살고 있었을텐데요... 공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여러분의 삶을 함부로 재단해서 미안합니다. 하루하루 정말 수고 많으실텐데 그런 당신들의 삶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무례하게 판단한 점 미안합니다...


 어쩌면 내가 이곳에서 5년을 살며 듣고 싶었던 말이지 싶다. 좀 더 정확히는, 이런 내 맘을 알아주고, 들어주고, 믿어주고, 함께 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섞인 말들이다. 영어가 서투니 원어민 회사에는 감히 명함도 못 내밀겠더라. 여기서 한 번 무너지고. 한국업체는 같은 동포끼리 그렇게까지 막 대하고, 속이고, 노동학대를 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의 이야기들을 너무 많이 들어서 가고 싶지가 않더라. 여기서 두 번째 무너진다. 결국 영어가 장벽이 되지 않고, 별꼴인 사람들과 크게 부딪힐 일 없는 물류 관련 일을 하고 있으니 나는 정말 앞서 내 스스로 정의한 외노자에 딱 맞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그런 외노자의 마음을 스스로 헤아리게 되는 것 아닌가 말이다.  


 살다보면 죽을만큼 이해받고 싶고, 미치도록 내 말을 쏟아내고 싶을 때가 있더라. 성격 자체도 예민하고 소심했던터라 이해받고 싶다는 말도 못 하고, 함부로 내 말을 쏟아내지도 못하며 살아왔다. 아주 가끔 그런 기회가 생겨서 입을 떼게 되면 딱히 말한 것도 없는데 눈물부터 왈칵 맺혀버리는 이 188cm, 82kg의 40대 성인 남자라니... 


 그러면 외노자들은 다 이렇게 사는가 라고 자문해보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현재 내가 느끼는 현실은 비전 결핍과 생활고와 약간의 향수병이 5:4:1의 비율 정도로 맺은 모양새로 보인다. 역시나 마지막은 이 질문으로 장식한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외노자로서 손에 잡힐 듯 해서 움켜지면 사라져버리는 것이 내게는 ‘내일’인 것 같다. 미래라고도 하고, 비전이나 꿈이라고 해도 좋다. 영화 <아저씨>에서 원빈의 그 유명한 대사. 


니들은 내일만 보고 살지. 내일만 사는 놈은 오늘만 사는 놈한테 죽는다.
난 오늘만 산다. 그게 얼마나 * 같은건지 내가 보여줄게

 ‘오늘만 사는’이 주는 뉘앙스에는 쓸쓸한 오묘함이 있다. 내게는 간절함이다. 내일이 허락된 사람에게는 오늘은 내일로 가는 다리일 뿐일지 모른다. 하지만 내일을 맞을 수 있을지 없을지 불확실한 사람에게 오늘은 그 자체로 꿈이고, 비전이다. 그래서 오늘이 곧 미래가 된다. 


 외노자인 내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라는 물음에 외노자인 내가 답을 달아본다. 오늘을 살자. 내일을 끌어당길 수 있는 힘은 내게도, 누구에게도 없다. 그저 지금 주어진 오늘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오늘을 살자. 1초, 1분의 작은 시간들이 소중하다. 나를 슬프게 하는 1초도, 나를 기쁘게 하는 1분도, 나를 열받게 하는 1시간도 내게 오늘이 주어져 있다는 증거들이다. 열심은 필요한 것이지, 만능열쇠는 아니다. 여유는 누리는 것이지, 당연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 자신에게 특화된 답이겠지만,) 스스로를 계속 살펴본다. 나의 열심의 질과 양과 깊이를 들여다보고, 나의 여유가 나 혼자 힘으로만 겟한 것이 아님에 고마움을 느낀다. 지금 이렇게 써놓고 또 한 번 더 묻는다. 


"오늘을 어떻게 살 것인가?" 


20220503 - 20220729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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