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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콜과 구공탄 Aug 28. 2022

너, 야, 그래, 뭘, 했음

사람, 반말, 그리고 소통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은 대개 존댓말로 관계의 문을 연다. 안녕하세요?, 감사해요, 맞아요... 반면에, 사회생활의 이런 면과는 별개로 반말로 이어지는 관계도 있다. 뭐하냐?, 뭐 그런 걸 가지고 생색이야, 그건 그렇지... 이 후자의 관계. 최근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부류다. 반말로 생각과 농담을 늘어놓고, 받아줄 상대가 있는 사람들. 존대말로 시작했지만 존대하는 자세로 지속되지만은 않는 사회 생활 속의 부하나 후배에게 던지는 그것과는 다른 개념이다. 막 던지는 것 같아도 상대를 깎아내리는 막말은 아닌, 서로를 믿고 편안해 하고 있다는 걸 누가 들어도 알 수 있는 반말. 가끔 선을 넘는 듯 보이는 가득한 장난기가 오해를 불러일으킬 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친밀감과 연대가 느껴지는 반말. 그런 반말들의 향연... 쩝...  


 생전 생각해본 적 없는 이 반말 개똥철학을 내 안에서 소환시킨 건 어제 얼마 없는 어떤 친구와 나누던 톡이었다.  


“어, 그러고보니 내가 반말을 한게 언제지? 이렇게 반말하는 사람이 있었나?” 


 더듬고, 더듬어 보니 2011년 대학원 시절 만난 (아마 3살 어린) 남자 동기 한 명과 어제 연락한 친구 한 명 뿐이었다. 그 외의 모든 사람들에게는 모두 존대말로 대하고 있음을 그때 깨달았다. 꽤 충격이었다. 이렇게 편하게 지낸 사람이 없었나? 내성적이고, 자신감이 없는 나는 몇 년간 함께 회사생활을 한 후임에게도, 이런저런 계기를 통해 알게 된 어린 친구들에게도 말을 잘 놓지 못 한다. 상대에게 내가 그/그녀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심어주기가 싫어서였을까? 말을 함부로(?) 놓았다가 나를 싫어할까 싶은 걱정이 앞섰던 것 같다. 


 누군가는 내게 편하게 말 놓고 만날 사람 그렇게 없는가, 어째 인생을 그렇게 살았냐고 타박을 놓을지 모르겠다. 나라도 그랬을지도. 하지만 이제는 이마저도 내 인생이려니 한다. 40대 중반을 바라보고서야 말이다. 그냥 내 옆에서 내가 반말하며 2022년을 살아가는 거의 유일한, 아내라는 친구와, 아들이라는 소년과, 딸이라는 소녀를 존중하며, 하루하루 친밀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할 뿐이다. 내 성격에 아무하고나 말을 놓고 편하게 지낼 수 있게 되어도 깊은 친밀감을 경험하기는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 그런데 이런 경우 좋은 점은, 관계가 필터링이 된다. 존대말로 하는 관계의 친밀감이 낮고, 반말을 하는 관계의 친밀감이 높다는 식으로 결론지을 수 있는 사안은 분명 아니다. 대한민국의 남편들의 3대 적 중(ㅎㅎ)의 하나라고 하는 최수종씨와  하희라씨 부부가 다 큰 자녀들에게 존대말을 하는 모습을 보고는 어휴, 왜 저래, 저렇게까지 해야 해? 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기는 했다. 여전히 알 수 없는 불편감이 남아있지만, 그 부부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 상대가 누구든 말을 높여서 하게 되면 말할 때 의도와 표현 선택에 신중하게 되고, 상대를 배려하게 되는 장점이 분명 존재한다.

 따지고 보면, 존대말과 반말 여부가 내가 원하는 관계, 즉 친밀한 관계 여부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보니, 내 주변에 교류하는 사람의 수가 '충분하다'고 하기는 어려울 뿐, 친밀감을 누리고 싶었던 소수 정예의 사람들과는 나름 관계를 잘 다져왔다고도 볼 수 있겠다. 아마도 다른 사람의 떡이 커보인다는 속담처럼, 내게 없는 것(인싸처럼 보이게 하는 북적북적한 주변사람들)에 대한 동경심이 내 마음을 속좁게 만들었다. 


 반말이냐, 존대말이냐가 중요하게 아니었다. 나와 존중을 나누고, 서로에 대한 관심을 진심으로 갖고 있는 사람들. 핵심은 친밀감이었고, 진심을 갖고 대하는 사람들이었다. 때로는 거칠고, 때로는 엉뚱하고, 때로는 한없이 무거워지는 말들이 오간다 할지라도, 나를 향한 관심과 진심이 있다면... 이제는 괜찮다. 한없이 괜찮다. 앞으로 괜찮을 것이다. 


 *당신 주변에도 분명 당신을 향한 관심과 진심을 가진 사람이 있다. 장담컨대, 있다. 둘러보고, 분별해서 받아들이고, 잘 사귀어보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수용하는 용기와 표현하는 용기다. 용기가 나를 자유케 하리라~


20220520 ~ 20220828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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