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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콜과 구공탄 Jan 28. 2023

공감하면 잘 살 줄 알았는데

사람, 무덤덤함, 그리고 소통

 1887년 3월 3일. 어느 가정교사 한 명이 미국 Alabama에 있는 기차역에서 내린다. 그녀의 이름은 Annie Sullivan. 그 동네에 살던 한 장애인 아이를 맡아 가르치기 위해 왔다. 듣지도, 보지도 못 했던 이 아이는 그날부터 사사건건 ‘애니’와 부딪힌다. 사소한 일에도 짜증과 화를 참지 못 하던 아이는 애니에게도 역시나 퍼붓기 시작하며 그녀들만의 전투가 시작된다. 글자를 배울 수 없었던 아이에게 인형(doll)과 케익(cake)이란 글자를 가르쳐주기 위해 애니는 아이의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한 글자씩 써주며, 인형을 만져보게도 하고, 케익을 얼굴 앞에 내밀기도 한다. 향후에 이 아이는 그때 당시에 애니가 쓰고 있는 단어들이 존재하는지도 몰랐으며, 자신은 손가락으로 마치 원숭이처럼 따라할 뿐이었다고 고백했다. 냅킨 접는 법을 알려주려고 하면 아이는 소리를 지르고 발을 굴렀다. 애니는 몇 시간이 걸려서라도 결국에는 아이가 냅킨을 접을 수 있도록 만든다. 가족 식사 시간에 다른 가족들의 접시에 있던 음식을 손으로 먹곤 하던 아이에게 그렇게 하지 않도록 숟가락을 쥐어주지만, 역시나 집어던진다. 애니는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아이는 숟가락을 가지고 음식을 먹게 되었다. 


 이 아이의 이름은 헬렌 켈러.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강연가다. 듣지도 보지도 못 했던 이 소녀는 듣지도 보지도 못 하는 사람들을 위한 교육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거의 전무했던 시절을 살아내며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훌륭한 인물로 성장했다. 그녀의 훌륭함에는 흔히 ‘설리번 선생님’으로 불리는, 애니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헬렌 켈러에 대한 책을 읽는데 내 눈에 들어온 건 되려 애니였다. 


 ‘공감 잘 하는 사람이 오히려 성공하거나 뭔가를 이뤄내기는 힘들 수도 있겠구나.’ 


 늘 경청이나 공감, EQ 같은 것들의 중요성을 들어왔고, 그것들이 몸에 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애니 설리번의 모습을 보다가 문득 내가 너무 한쪽으로 치우쳤구나 싶었다. 오감이 너무 발달하거나 타인의 마음에 지나치게 귀 기울이게 되는 사람은 따뜻하거나 착하다는 이야기를 들을지는 몰라도 뭔가를 크게 이루기는 어렵겠다는 맘이 올라온 것이다. 아픈 말을 듣거나 내가 한 선행이 오해를 받을 때도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치지 못 했다. 공감하는 사람은 본인이 아플 때 조차도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 했다(고 착각했다.) 그렇게 그 자리에 머무를 때,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그것이 상처가 되고, 결국 흉터로 남는다. 이러면 공감도 뭣도 아닌 게 되버린다. 그 흉터를 볼 때마다, 혹은 비슷한 상황이 반복될 때마다 그때 그 순간의 과거 감정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과 사람을 통해 재연되는 것이다. 보통은 ‘트라우마’라고들 하더라. 


 헬렌 켈러의 성질머리는 충분히 납득이 된다. 그녀의 다크월드가 그녀를 미치지 않게 만든 것만으로도 이미 훌륭하다. 꼭 베스트셀러를 써서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 전도사가 되어서가 아니라, 그 깊고, 짙은 다크월드 속에서 하루하루 현실을 살아낸 것 자체가 놀라운 사건이다. 그런데... 그 충분히 납득이 되는 성질머리가 나를 향한다면 어떨까? 얼마든지 욕 한 사발 퍼붓고 뛰쳐나올 수도 있었겠지만, 애니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도 어린 시절에 눈이 잘 보이지 않았다. 또한 고아였다. 그 외로움이야 말로 다할수 있을까. 그런 애니가 그 어리디 어린 10살도 안 된 헬렌 켈러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지 않았을까? 하지만 애니는 헬렌 켈러를 공감한답시고 섣불리 이해하는 모션을 취하지도 않았고, 따뜻함으로만 다가가지도 않았다. 애니는 헬렌의 성질머리 앞에서 덤덤히 자신의 갈 길을 갔다. 내게는 그것이 오히려 애니가 헬렌을 더욱 애정하고, 가르치는 선생님의 모습으로 보였다. 이제 짧은 몇 개의 일화들을 읽었을 뿐인데, 애니의 무덤덤한 열정에 다각도로 깊은 관심이 생긴다. 


 나는 다른 사람의 아픔을 지나치지 못 한다. 그렇다고 돕는 일에 열심을 낸다거나 내 욕심을 충분히 절제하는 편도 못 된다. 이러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쓸데없는 죄책감과 억눌리는 자아욕구(?) 사이에서 방황하는 어린양이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돕고 살아야 된다는 강박이 생기는 반면,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들을 하지 못 하는 욕구불만이 현실을 사는 내 앞에 엄청난 장애물이 된다. 


 따뜻하면서 무덤덤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내가 꿈꾸는 인간상인, 잘 균형 잡힌 사람의 특징이 아닐까? 설리번 선생님도 헬렌 켈러가 보인 무례하고 공격적인 행동과 모습들로 눈물도 많이 흘리고, 상처도 많이 받았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녀가 외적으로는 무덤덤하게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내적으로는 따뜻하면서도 긍휼한 마음을 갖고 헬렌 켈러를 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이유가 앤 설리번 선생님이 헬렌 켈러를 견뎌낼 수 있게 한 요인이요, 이중잣대로 평가받아 끊임없이 상처받고 고민하는 (나이를 불문하고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꽤 괜찮은 면역력 강화제가 되어줄 수 있지 싶다.  


 덤덤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 상처 받을 일이 생겨도 흘려보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따뜻하면서도 소신껏 대처하며 사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 앤 설리번 선생님이 헬렌 켈러를 대하는 모습 속에서 물 밑에 물갈퀴를 죽어라고 휘젓고 있는 오리가 떠오른다. 마음속으로 어떤 생각이 제멋대로의 방식으로 휘젓고 다니더라도 그저 매일의 삶 속에서는 덤덤하고, 태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려면 역시나 상처 잘 받는 법을, 덜 아프게 맞는 법을, 태풍을 맞아도 중심은 놓치지 않는 법을 배워나가야 될텐데... 드럽게 어렵네... 


 어른이 되는 만큼 답도 늘어갈 줄 알았는데... 질문이 10배는 더 많아진다. 아마도. 아마도 내 생각에... 삶에 대한 질문을 10배, 100배 많이 가지게 되면 좀 더 덤덤하게 받아칠 수 있는 여유가, 그리고 경우의 수가 넉넉히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억지 위로를 해본다. 


 20230128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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