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바지를 입게 된 상황에 대해
2010년부터 시작한 회사 생활, 10년이 훌쩍 넘은 직장인이 되었습니다. 패션업 회사가 다른 직종보다 복장에 자유롭고 관대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디자이너를 제외하고는 저 같은 머천다이저에게는 반바지는 물론 볼캡도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여름에도 긴 바지에 늘 정돈된 머리를 지켜야하며 샌들 같은 것도 상상도 못할 정도였습니다.
다행인지 저의 패션 철학 중 하나는 다리를 드러내지 않는 것입니다. 남성의 다리는 드러내는 것은 그다지 근사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바지, 샌들 같은 것은 제 출근 복장에는 절대 들어갈 수 없는 아이템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입는 것에 지적하거나 불만을 삼지 않습니다. 남의 강요가 아닌 나름 제가 가진 패션 신념이었습니다. 적어도 요 몇 년 전까지는 말입니다.
최근 몇 년간 엄청난 더위와 습도를 경험하면서 여름이 고통스럽다고 느꼈습니다. 긴 바지 안에서 올라오는 땀과 습한 더위가 아침부터 괴롭혔고 양말은 늘 찜찜하게 땀이 스며들었죠. 여름 저녁에 누군가를 만날 때는 꼭 집에서 샤워를 하고 나갔습니다. 도저히 신념으로는 이겨낼 수 없는 상황까지 온 것이죠.
올해 가장 더웠던 6월의 어느 날, 저는 도전을 해 봅니다. 검은색 울 반바지에 긴 팔 리넨 셔츠를 입고 송치 로퍼를 신고 출근을 했습니다. 주중에 사무실을 가는데 반바지라니, 이 어색함에 이 긴장감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미묘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제 신념을 지키기에 너무 더웠고, 저는 이제 남성복이 아닌 캐주얼 브랜드에서 근무하기에 이 2가지 핑계 아닌 핑계로 반바지를 입었습니다.
어색한 마음을 가지고 출근했지만 전혀 그 누구도 제 복장에 문제 삼지 않았고 (회사 사람들은 반바지에 샌들을 진즉에 입고 다닙니다.) 저 또한 오후가 되니 원래 그랬던 것 마냥 잊고 있었습니다. 퇴근길 집에 가는 길이 선선해서 오늘 날씨가 덜 덥나 싶었는데, 아! 내가 반바지를 입었지 하고 혼자 생각을 했습니다. 10년을 넘게 가진 신념은 참 쉽게도 잊힙니다.
반바지를 한번 입고 청량한 출근길을 경험하고 나서, 출근용 반바지를 사는 제 모습을 발견합니다. 로퍼와 입을 만한 포멀 한 반바지 (포멀 한 반바지라는 게 어색하지만 요즘은 울 소재에 턴업 디테일까지 포함한 반바지가 출시합니다)를 찾아서 주말에 구매해서 입어봅니다.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거울을 보면서 그간 지켜왔던 신념을 생각해 봅니다.
시대가 바뀌고 사람이 바뀌면서 생각은 어느 정도 유연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남성복 기획을 하면서 갖고 있었던 패션 매너에 대한 신념은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답답하고 융통성 없는 고집불통의 느낌을 갖게 할 수도 있습니다. 캐주얼 패션을 하면서 패션에 대한 생각, 기조, 신념이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 슈트가 모든 옷보다 멋지지 않으며, 티셔츠는 생각보다 꽤 재밌다는 점 등등.
그중 반바지는 제 스타일을 바꾸는 가장 큰 아이템입니다. 제 스타일을 바꾸면서 또한 제 신념을 바꾸었습니다. 옷이 아무리 근사한들 좋은 소재인들 시기에 맞는 적절한 디자인이 가장 중오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반바지를 입는 남자가 늘어난 만큼, 여름을 더 근사하게 만들어 줄 멋진 반바지를 만들어야 하는 게 저의 새로운 기획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