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서울 여행

2부 사랑의 형태 - 2022.04 서울 종로

by micn


오전 7시 44분 서울행 기차 도착까지 10분 정도 남았다. 올라가서 커피 마시고 오기도 애매한 시간.

수원역 플랫폼 의자에 앉아서 필름 카메라를 가지고 놀았다. 실수로 한 컷을 찍혔을 때 등골이 오싹했다.

지금 컬러 필름은 한 통에 2만 2천 원이다. 한 컷마다 돈이다. 조심해야 한다. 문득 카메라를 무서워하며

들던 옛날 기억이 떠올랐다. 돈도 없던 시절이라 지금보다 더 한 컷이 귀했다. 15년 전 필름 가격을 보여주던

기억은 다른 것도 들고 왔다.


생각지 못한 기억에 미소가 지어졌다.

동아리 때 우리는 막 찍는 사진을 막 사진이라 불렀다. 필름 통수를 채우기 위해 막 사진으로 도배하는

친구들을 놀려대곤 했었다. 막 사진이라 놀림 받던 친구도 부끄러워했었다.

근데 지금은 막 사진이 일상이 되었다. 필름에서 메모리로 바뀐 세상에서 낭비가 일상이 되었다.


역으로 진입하는 기차를 필름 카메라로 찍는다.


다행이다.

기차는 안 바뀐 기분이다.


무궁화호. 새마을도 있었지만 나는 굳이 무궁화호로 예약했다.

빨간색과 흰색, 파란색. 화려한 색상에 비해 육중한 몸이다.


기관실 뒤쪽으로 객차들이 줄 서 있다.

다행히 2호차라 멀지 앞쪽에서 멀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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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실은 여전히 옛 기차의 흔적이 남아있다.

밝지 않은 조명에 쿠션감 있는 의자.

좁아 보이지만 않으면 넓은 자리.

창가의 차가운 알루미늄과 투박한 커튼.


자리에 앉자마자 냄새부터 집중했다. 어느 정도 탄내와 기차 특유의 냄새가 섞인 걸 기대했었다.

하지만 냄새가 나지 않았다. 무향, 오히려 마스크의 냄새만 느껴졌다. 사라진 기차 냄새에 아쉬웠다.

코로나 영향으로 공조 장치에 신경 쓴 건가? 어쭙잖은 망상과 함께 기차는 서울로 향한다.


어릴 적 기차에는 껌부터 과자, 소시지, 육포, 오징어 등 맛있는 것을 잔뜩 실은 카트도 있었다.

차게 식힌 맥주도 본 것 같은데 어릴 때 기억이라 긴가 민가다. 좁은 통로를 카트로 밀면서 오는 아저씨가

중저음으로 정체 모를 단어를 외쳤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그 목소리만 들으면 갑자기 물욕이 생기는 건 당연지사.

내게 꼬리가 있었다면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을 것이다. 카페 칸과 자판기로 카트가 대체 당한 지금,

카트가 오는 기쁨과 조급함, 설렘은 어디서 느낄 수 있을지.

카트 아래쪽에 있었던 도시락. 한 번쯤은 먹고 싶었는데 말이다.


기차는 한강을 건너기 시작했고 안내방송으로 곧 서울역에 도착을 알렸다.


8시 21분. 서울역에 도착했다. 등에는 아픈 디지털카메라를 엎고 목에는 필름 카메라를 걸고 있다.

촌스러운 내 모습이 비친 거울을 스마트폰으로 한번 찍어본다.


오늘은 디지털카메라 없이 필름 카메라로 이번 여행을 기록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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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벅이에 필름 카메라.


스마트폰만 없으면 딱 20대 내 모습이다. 서울역 거울 앞에서 결의를 다진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니 20대의 기억들이 점차 잊히고 있다.

신입사원 때의 기억이 신입생 때의 기억을 잠식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 여행을 준비했다. 서울에 뿌려져 있는 15년 전 기억 조각들이 잘 있는지 구경 갈 생각이다.


아침 9시 30분. 흐리지만 먼지가 없는 하늘이다. 5분 정도 적당한 소음 속에서 청계천 옆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한 손에는 서비스센터 1층 편의점에서 커피를 들고 있었다. 평소에 달아서 잘 안 먹는 프렌치 카페다.

렌즈에 이상이 있을 줄 알았는데 카메라 본체 문제로 판별되었다. 렌즈는 무상 수리 기간이지만 본체는 아니다.

무시무시한 수리비가 머릿속을 맴돈다. 달콤한 커피가 오늘은 무미다. 어쩌다 본체가 고장 났는지 멍때리며

커피를 마셨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날로그를 선택한 나에게 디지털이 보복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흑백사진 동아리 활동으로 흑백 필름을 사러 종로 3가로 자주 왔었다.

이곳에서 살 수 있는 속칭 “감은 필름” 때문이다. 당시 메이저 필름 기업들이 점차 필름 생산을 중단하는

시점이었다. 필름 가격은 달마다 가격이 점차 올라갔다. 한 통 가격이 점심 밥값이 되며 부담이 되었을 때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가 지갑을 비추었다. 바로 “감은 필름” 다. 재활용 필름 통에 사람이 직접

필름지를 재단해서 만든 필름이다.


아쉽게도 “감은 필름”을 팔던 삼성사는 2011년 즈음에 문을 닫았다고 한다. 갈 수 없는 삼성사 대신 삼성사

갈 때마다 들리던 생선 구이집으로 발걸음 중이다. 종로3가역 15번 출구에서 조금 걸으면 왼쪽에 나오는

좁은 골목. 기억에 의지해 찾아간 그 골목 안쪽엔 생선 구이집이 아직 있었다. 가게 앞 여인숙도 모텔이

되었는데 식당은 기특하게 그대로다. 반가운 마음에 카메라로 골목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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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데군데 내가 묻혀둔 게 많구나. 회현역 다 와서 생각이 들었다. 시청 앞 호텔에 볼일을 다 보고 나와서

예전 아르바이트 시절 생각에 당시 출퇴근 길을 걸어왔다.


아르바이트가 너무 힘들었던 기억.

여자 친구가 몰래 찾아와서 좋았던 기억.

크리스마스 조명이 좋아 신났던 기억.

첫 월급에 아빠 간식 사 들고 퇴근하던 기억.


잊고 있던 수많은 기억 들이 아직도 건물들 사이사이에 묻어 있었다.

롯데 백화점, 신세계 백화점, 한국은행 본점, 남대문 시장, 회현역 입구. 여러 종류의 건물들이지만

모두 같이 그리운 색으로 칠해져 있다. 잔향처럼 느껴지는 그때의 기억을 느끼며 추억이 서려 있다는

표현을 곱씹고 있었다.


오전 11시 5분. 목적지인 예총 회랑에 바로 가기 전에 건너편 출구로 나왔다. 예총 회랑 건물 전경을

바라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만 나오고 나서 예총 회랑 건물을 바로 찾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서 새롭게

리모델링 해버린 건물을 바로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건물?

저 건물?


검색으로 예전 위치를 확인하고 나서야 알았다. 지금은 예총 회랑도 아니고 건물도 달라졌다는 것을.

마로니에 공원 바로 옆에 있는 예총 회랑은 옛 모습이 아니었다. 바뀐 부분을 찾는 것보다 남아있는 부분을

찾는 게 더 빠르겠단 생각도 들었다. 건물을 두 바퀴 돌고 마로니에 공원도 한 바퀴 돌고.

예전의 기억이나 느낌이 아까와는 다르게 선명하지 않아서 섭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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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쉬지 않고 돌아다녔기도 해서 카페에 들어갔다.

시원한 커피 하나 잡고 자리에 앉으니 동아리 사람들에게서 연락이 많이 와 있었다.

아까 예총 회랑 사진을 찍어서 보낸 것에 대한 답들이었다. 섭섭한 나와는 다르게 다들 신나 있다.


그때의 기억들로 이야기들이 맺히기 시작한다. 우리는 매년 겨울, 정기전을 개최했다.

26기인 내 기수를 기준으로 동아리 나이를 가늠할 수 있는 흑백사진 동아리는 연말 정기전을 위해 1년 동안

사진을 찍고 필름을 현상하고 사진을 인화해야 했다. 정기전을 위한 1년이라는 주객전도의 느낌도 있지만

모두가 정기전을 동아리의 정체성으로 인지했다.


정기전은 이곳 대학로 예총 회랑에서 진행되었다.

내 사진이 남에게 평가받는 아찔한 기분도 남아있었지만

모르는 사람들이 와서 나의 동아리라고 말하는 신비한 곳이기도 했다.


컵에 맺힌 물방울을 만지작거리며 스마트폰에 쌓여가는 이야기들을 읽어간다.

장소에 대한 그리움, 시간에 대한 아쉬움. 친구, 후배 할 것 없이 이야기한다. 필름 현상과 사진 인화.

바쁜 일상에서 잊고 지냈던 과정들을 서로가 맞춰가며 이야기했다. 각자가 알고 있는 조각들을 꺼낸다.

조각들을 대보고 이어가며 우리가 알고 있는 과정이 되었다.

모두가 완성 시킨 과정으로 다시 한번 왁자지껄 이다.


어느덧 컵 안의 얼음이 다 녹았다.

우리의 이야기도 현실로 왔다. 기약 없는 만남만을 서로에게 남기고 나는 건물을 나왔다.

떠나기 전 예총 회랑을 바라봤을 때 여전히 어색했다. 그래도 그 시절에 대한 기억에 다시 한번 건물을

한 바퀴를 돌아본다. 20살 초반의 기억들로 나를 가두기 시작했다.


철없던 시절. 사랑을 모르던 시절. 뾰족한 그때.

무섭도록 부끄러운 기억들 뿐이다.

가려진 게 아니라 숨긴 건가? 미안한 마음도 생긴다.

부모님께 정기전에 한번 와 보라고 말을 해볼걸. 아쉬운 마음만 깊어져서 빠르게 혜화역으로 도망쳐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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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 언저리. 호텔에서 낮잠 늘어지게 자고 일어났다.

감기약에 취하듯 침대 위에서 녹아드는 느낌으로 잤다.

혜화역에 나와서 인사동, 종로, 광화문 등을 거느리고 온 것이 문제였을까?

아침부터 부산 떤 게 문제였을까? 2시간 정도 잔 것 같은데 몸이 무겁다.


오늘 여행은 여기까지란 마음으로 근호에게 연락했다. 동아리의 새해 첫 촬영지는 언제나 경복궁이고 뒤풀이는 언제나 피맛골이었다. 지금은 피맛골이 재개발로 사라진 상태다. 피맛골에서 뒤풀이는 불가능하니 인사동에서 뒤풀이할 예정이다. 시청역에서 인사동까지 애매한 거리라 전철을 타고 가고 있는데 근호로부터 연락이 왔다. 연등 축제로 도로 통제가 되어 늦는단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늦는다는 연락보다 연등 축제가 더 놀라웠다.


종각역에서 내려서 올라갔을 때 아침의 종로 거리가 아니었다.

축제를 즐기기 위해 도로는 통제되어 있었고 거리는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낮잠 한번 자고 나니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


많은 인파 속에서 우여곡절 끝에 근호와 접선을 해서 막걸릿집으로 들어갔다.

중 고등학생 시절 연등 축제에 참가했던 근호 이야기를 듣다 보니 2킬로 정도는 금방 걸었다.


도착한 술집은 옛 주막 느낌의 내부는 우리를 20대로 불렀다.

막걸리와 기름 냄새, 주황색 불빛, 나무로 된 테이블과 청사초롱, 초롱불.

둘이서 뒤엉킨 기억을 낄낄대며 이야기를 나눴다.

흡사 보고와도 같이 오늘 일에 대해 들어주고 반응해주는 근호가 고마워서 술은 내가 샀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 축제가 끝난 도심 거리에서 청계천 물줄기 소리를 들으며 앉았다.

싸늘한 빌딩 숲 사이에서 인적도 차량도 없이 적막이 깔려있어야 할 장소에 흐르는 물줄기 소리가

나쁘지 않았다. 짧지만 길었던 오늘 하루였다. 아침부터 걸어 다니고 구석구석 보았다.

흐르는 물 위에 꺼져있는 연등을 보면서 오늘을 시간순으로 나열해 보고 정리하며 하루를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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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소리에 잠이 깼다. 눈을 뜨자 밝은 방이다.

아차차.

너무 푹 자 버렸다. 시청 앞 광장에서 노동절 기념으로 행사 준비하는 소리에 일어났다.

창문에서 들어오는 맑은 햇살을 보며 심히 당황했다. 새벽 덕수궁 사진을 찍으려 했는데 말이다.

알람 소리도 못 듣고 푹 자버린 듯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다행히 체크아웃 시간 전이었다.

조식 시간이 애매하게 남지만 조금 느긋이 하자는 유혹이 마음에 들었다.

전날 총 3만 5천 걸음을 걸었던 나는 침대에 다시 녹아들었다.


5월 1일 정오. 내려오는 기차에서도 특유의 기차 냄새는 안 났다.

몸이 힘들고 불편한데 창가 쪽인 내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아 있었다. 티켓을 보여주고 창 측에 앉았다.

짜증과 피곤한 상태에서 떠나가는 서울 건물들을 바라보았다.

빌딩, 한강, 하늘, 구름, 차, 전철, 전선.

수많은 객체 들이 여러 조합으로 엉킨 풍경이었다.


갑자기 며칠 동안 도쿄 여행하고 돌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몇 박 정도 피곤하게 돌아가는 기분. 몸의 피곤함과 한낮의 도심 풍경이 낯설어서 내 마음이 그나마 비슷한

기억을 불러낸 것 같다. 그래도 서울 도심 여행 괜찮은데? 수원역에 도착했을 때 생각이었다.


그날 하루는 집에서 잠만 푹 잤다.


예총 회랑과 인사동에서 느낀 지도에 없는 사람 간의 관계,

관계 속에서 일화들을 보면 관계와 일화가 내 추억을 깊게 만들어주었다.

오히려 장소에서 못 느낀 추억을 이야기로 나누었고 즐거울 때도 있었다.

단순하게 인터넷 지도로 확인했으면 이런 기분이 들었을까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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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0.


서울에서 기억 조각들을 줍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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