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단양 여행

2부 사랑의 형태 - 2022.05 충주와 단양

by micn



전날 마신 포도주 때문에 좀 더 자고 싶다.

아까부터 밝은 햇살이 날 깨우고 있지만 이불로 애써 무시했다.


뒤척뒤척.


베개에 얼굴을 숨기며 내 속도 모르는 해를 탓했다. 다시 잠이 들 뻔하다 방문이 열린다.

외삼촌이 아니었으면 잠을 정오까지 잤을 것이다.


어젯밤 같이 달렸던 외숙모는 숙취도 없이 아침을 차려주셨다.

애호박, 토마토, 꽈리고추를 각각 본래의 향을 느낄 수 있게 구워주셨다. 담백한 채소 반찬에 집밥을

좋아하는 날 위해 된장찌개도 끓여주셨다. 여기에 주인공으로 전복이 들어간 누룽지탕이 나왔다. 정말 푸짐한 아침이다.


차려진 아침에 외할머니가 나보고 매일 오라 하신다.


코로나 때문에 자주 찾아오지 못했던 나를 이렇게 환대해 주심에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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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안 떠났냐는 엄마의 카톡에 빠르게 씻고 외갓집을 나온다.


다음에 올 때는 꼭 여자 만들어서 데리고 오라는 외할머니 말씀이 자꾸 가슴에 꽂힌다.

의도치 않은 불효에 각 잡고 꼭 만들겠다고 했다.

“연애는 저도 꼭 하고 싶습니다.” 목에서 나오는 소리를 꾹 누르면서 말이다.


금, 토는 충주 방문, 토, 일은 단양 여행으로 계획했다.


정읍에서 연구로 밥 먹고 있는 서현진에게 올라오라고 해서 오늘 둘이서 놀 예정이다.

원래 셋이었는데 아쉽게도 권순재는 개인 사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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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 에게 미안하지만, 오늘은 친구랑 한 잔이 목적이다.


소백산 구인사로 서현진(이하 서 박사. 나에겐 이 녀석 이름이 어색하다.) 차를 타고 떠난다.

고등학교 친구인 서 박사와 여행을 자주 다녔다. 각자 연인 없을 때만 말이다.

그리고 슬프게도 지금도 마찬가지다.

몇 달 전 이별한 이놈에게 시답잖은 농담만 건넨다. 서로가 아무리 친해도 남 상처 벌리는 농담은 못 한다.


잘살고 있나 보네.

받아치는 농담으로 이별을 이겨내고 있는지 가늠만 할 뿐이다.


구인사는 소백산 산기슭에 길쭉하게 위치한 절이다. 절이 산을 타고 있어 오르막길로 되어 있다.

이때까지 봐온 절과는 다르게 중국풍의 건축양식과 실용적 형태를 띠고 있다. 콘크리트로 층층을 쌓아 올린

건물들과 경사에 맞춰 서 있는 건물들은 내가 알고 있던 절과는 달랐다. 층을 진 건물에 기와지붕이 있어

중국 무협지에 나오는 절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항상 수수하고 절제된 모습만 보다가 화려하고 높은 절을 보니 신기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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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인지 절인 지. 쉬지 않고 나오는 계단을 땀을 내며 오르고 있었다. 숙취에서 가지를 뻗기 시작한 생각은

어제의 술자리까지 닿았고 나는 어제 이야기를 정리하며 계단을 올랐다. 외숙모와 둘이서 술을 마신 건

처음이었다. 이야기하는 게 너무 좋아서 다음에도 포도주를 사 들고 뵙고 싶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외숙모는

사랑이 참 많으신 분이라는 걸 다시금 느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부터 시어머니인 외할머니에 대한 사랑까지.


옛날이야기부터 요즘 이야기까지 즐거운 대화로 이어졌었다.

오르는 계단 길에 외숙모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피어오른다.


한 달 전 서울 여행에서 떠오른 몇몇 20대의 기억에 나는 부끄러웠었다. 사랑이 사랑인 줄 몰랐기에 사랑을

받을 줄 몰랐다. 부모님, 연인, 친구들 모두 밑 빠진 독에 사랑 붓기였을 것이다. 받을 줄도 모르던 사랑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형태는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멍하니 서 있는 바람에 시간은 물결을 타고 흘러갔다.


물결을 타고 떠나간 인연들이 많았다.

사랑의 형태를 조금 더 일찍 알았으면 지나간 연인들을 잡을 수 있었을까? 더 일찍 알았으면 좀 더 부드럽게

표현하지 않았을까? 날카롭고 뾰족했던 내 모습을 떠올리며 오르막길을 올랐다.


절의 정상으로 올라왔을 때 시원한 풍경의 상쾌함과 마음속 답답함을 동시에 느꼈다.

과정의 부정이 정답은 아니지만 만약이란 생각이 머릿속에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엉킨 머릿속으로 주변을

둘러보니 이해가 안 간다.


숨이 차서인가.

날이 더워서인가.

아 아닌가 보다.


서 박사도 같은 걸 보고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절이 황금색이다.

밝은 햇살에 기왓장부터 황금색으로 빛나는 절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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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태종은 주경야선을 수행하는 신조로 모든 재원은 임야에서 얻는다 한다. 살기 위해서는 직접 경작하고

채집해야 한다.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계율로 고기를 먹지 않는 조계종과는 다르게 천태종은 개, 닭, 달걀을

제외한 육식이 허가된다.


낮에는 고된 농경일, 밤에는 참선의 삶이기에 육식을 통한 체력 회복은 천태종 스님에겐 필수였을 것이다.

이렇게 행위에 당위성이 있는 천태종이기에 황금색 절의 존재가 궁금했다.

이유 있는 황금이었을 것이란 생각에서 말이다.


절을 나와 고수 동굴을 다녀오고 단양 전통 시장에서 안주를 사러 왔다. 생각보다 험난했던 고수 동굴 때문에 시원한 맥주와 샤워가 절실해졌다. 고수 동굴은 종유석과 석순이 즐비한 동굴이다. 조명과 철제 통로로 관람하기 편하게 구성되어 있다. 다만 동굴이 위아래로도 길어 계단이 많이 있고 습기까지 차 있어 관람하다 땀으로 다 적셨다.


산 같은 절에 계단 많은 동굴. 정적인 여행을 계획했는데 땀내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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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찾아놨던 가게가 휴업이라 피치 못하게 횟집에서 회를 떠 왔다.

단양까지 와서 광어라니.


근데 이 집 맛있다.


숙성 회인지 감칠맛도 좋고 살도 제법 쫀쫀하다. 두께감 있게 썰어진 한 점이 입 안에서 부드럽게 씹힌다.

저항감이 없는 두꺼운 회 한 점을 삼키고 나니 맛있음에 또 한 점을 집는다. 양도 많아서 술이 부족하다.

서비스로 같이 포장해 준 콘치즈랑 파전, 시장에서 산 흑마늘 어묵, 떡갈비. 그리고 라면을 끓여왔다.


제법 맛있는 한 상이 완성되었다.


남한강은 천천히 흘러간다. 산을 타고 뉘엿뉘엿 저무는 해와 선선한 바람으로 우리의 시간도 느려졌다.

테라스에 여유롭게 앉아서 펜션에 들어오는 사람 구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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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여행에서 우리만 아는 이야기를 즐긴다. 근황부터 살아갈 이야기까지 잔으로 손뼉 치며 떠든다.

기울어지는 술잔만큼 대화의 향은 짙어간다.


서로의 고민 들이 공유된다.

하지만 서로에게 쉽게 답을 줄 수 없다. 그렇기에 더 좋은 술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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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서울 여행에서 보았던 부끄러움이 만들어낸 작은 호수가 내 마음에 있었다. 사랑을 모르고 있었던

부끄러움과 연애를 시작하지 못한 조급함 등 지금을 모면하기 위해 호수를 만들고 물속에 생각을 가두었다.

차분하게 유지 시키던 호수에 외할머니가 돌을 던졌다. 물수제비와 같이 연애를 하라는 돌을 던진 외할머니

말에 퍼져가는 파형을 보고 오늘 사랑 타령이 시작되었다. 수많은 사랑이 수많은 형태로 군데군데 존재한다.


부모님이 퍼준 사랑부터 외숙모가 차려준 사랑, 나를 걱정하는 외할머니의 사랑.

그런 외할머니에 대해 외삼촌의 요령 없는 사랑까지.


짧은 순간이지만 여러 사랑을 볼 수 있었고 생각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고맙게도 이제는 경험적으로 사랑의 형태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늦은 감도 있지만 다행이란 생각이 더 크다.

뾰족했던 나를 인정하고 조급함을 지워야 한다. 지금 내가 할 일은 다가올 연애를 준비하는 게 맞을 것이다.

다음날 서 박사랑 여주휴게소에서 헤어지면서 든 생각이었다.


차를 다시 영동고속도로 물결 속으로 빠뜨린다.

흐름 속에서 어제의 여행을 정리하며 차와 함께 떠내려갔다.

며칠간 좋은 사람들 속에 있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막히는 길의 복기가 즐겁다.

다음에도 사람이 목적인 여행이 나에게 있기를.



2022.06.07.



대화가 즐거운 곳들을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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