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사랑의 형태 - 2022.06 목포
해무는 육중한 몸으로 나를 품으며 바위 위로 올라갔다.
유달산의 정상을 천천히 덮는 광경에 1월 그렸던 물안개 모습이 다시 마음을 채웠다.
온 세상이 회색에 묻혔다. 차분한 흑백의 세상에 새 지저귐만이 남아있었고,
혼자 켜져 있는 조명의 불빛은 잔영을 뿌리며 해무와 흘러 퍼져 나갔다.
나는 그저 색들이 지워지는 주변을 말없이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주홍빛 가득, 채도 높은 일출을 기대했던 나에게 해무가 흑백의 천을 덮었다.
착잡한 내 마음을 해무는 모르는지 천천히 흘러만 간다.
5월 단양 여행으로 떠나기 전날, 나는 안산 본가에 들렀다. 6월 여행에 앞서 아버지에게 일정을 설명할
목적이었다. 아버지는 전남으로는 여행 경험이 없다. 그래서 내가 이전 목포, 담양 등 남도 여행 이야기하면
많이 부러워하셨다. 전남의 미식 여행에 대해 한 번쯤은 가고 싶었다고 말해 주시고 기회가 생기면 다녀오자
말씀하시던 차, 시간이 생겨서 계획을 세웠다.
금요일 저녁, 동탄역에서 기차를 타고 일요일 올라오는 금, 토, 일 여행을 기획했다.
아버지와의 여행은 코로나 이전 하노이가 마지막인데 내심 기대도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먼저 취소하기 전까지 말이다.
발주가 많아 못 오신 아버지를 대신해 회사 친구인 오병혁을 데리고 목포 여행을 다시 기획했다.
다만 일정을 뒤틀었다. 기존 일정에 일출, 일몰 일정을 추가하여 편한 일정에서 힘든 여행으로 기획했다.
여름의 긴 해에 일출, 일몰은 괴로운 일정이다.
목포 전부를 즐기기 위한 표면적 이유도 있지만 남자 둘이 할 게 없으니 미식이랑 사진 삼매경이다.
목포에 도착하자마자 먹부림 시작이다. 기차 안에서 목포에 도착하기도 전에 횟집에 전화했다.
민어 한 접시 포장하기 위해서다. 기차는 밤에 도착하는데 주변 식당이 다 문을 닫았다.
아까운 금요일 저녁을 버릴 수 없었다.
호텔에서 잘 차려진 민어 한 접시에 소주 하나로 친구와 목포 여행 개최를 선언했다.
그렇게 3월 제주 여행에서 목포 패싱의 한을 풀기 위한 여행이 시작되었다.
잠깐 잔 것 같은데 벌써 3시 반이다. 도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보자고 이 새벽에 일어나는지 생각이다.
세수하고 선크림 바르고 일출을 위한 등산을 준비한다.
체력 좋은 친구도 틈만 나면 침대에 다시 눕기 일 수다.
일찍 잔다고 잤지만 역시 새벽은 힘들다. 힘들게 나와보니 별은 보이지 않았지만 맑은 밤하늘이었다.
오늘의 일출은 절반 정도 성공이란 생각이었다.
숙소에서 20분을 걸으면 산 입구가 나오고 또 20분을 걸어 올라가면 정상이었다.
높지 않은 산이라 더 쉽게 일출을 기획했다.
5시 반에 뜨는 해를 맞이하기 위해 새벽 4시부터 분주하게 걸었다.
유달산은 약 200미터 정도의 바위산이다. 다만 정상까지 계단으로 구성되어 있어 바위산의 위엄에 비해
안전한 등산길로 올라갈 수 있었다. 쉬운 등산길에 비해 내 상황은 달랐다. 카메라 본체에 렌즈가 세 개,
가방까지 5kg은 쉽게 넘어간다. 여기에 삼각대까지 들고 가니 죽을 맛이다.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계속
닦아 냈지만 역부족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땀 폭발을 예상해서 미리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는 점이다.
정신없이 계단을 올라갔다. 숨과 땀이 터지고 터지다 보니 어느덧 오늘의 목적지에 다 달았다.
챙겨 온 물을 달게 마시며 숨을 달래고 땀을 식혔다.
사람이 열 명은 누울 수 있고 하는 유달산의 마당바위.
정상인 일등바위 옆이지만 일출 장소로는 시야가 좋아 오늘의 목적지로 삼았다.
어느 정도 땀을 좀 식힌 후 삼각대를 설치하는데 찝찝하다. 생각해 보니 올라오는 길은 이렇게 뿌옇지는
않았다. 올라오는 계단은 시내 방향이라 해무가 없었다.
다만 마당바위로 오니 바다 방향에서 해무가 넘어오기 시작했다.
시야가 점점 좁아지는 속도에 비례해 나의 불안감은 커졌다.
차라리 올라오기 전에 흐렸으면 시도도 안 했지.
마음만 점점 초조해져 갔다.
해가 뜨는 방향을 잡아주는 앱은 동쪽 어딘가에서 뜬다고 알려준다.
스마트폰 머리를 해 뜨는 쪽으로 맞추고 내 몸도 방향을 맞췄다. 나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지만
그곳에서는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해무가 오래전에 잠식한 곳이었다.
일출이 다가오며 주변이 밝아지고 있다.
덮고 있는 해무의 색이 달라진다. 점점 회색의 명도가 올라가기 시작해 일출이 다가오니 희고 푸른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시간을 보니 이제 곧 해가 떠오를 것이다.
두꺼운 해무 속에서 시작되는 일출을 짐작만 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시점에도 해무는 두껍게 흘러가기만 했다.
삼각대와 카메라를 해 반대쪽인 바다 방향으로 돌렸다. 힘들게 올라왔는데 쉽게 떠날 수 없다.
목포대교가 지나가는 풍경이지만 아까 해 방향과 보이는 건 똑같다.
다만 해가 떠올랐으니 바람이 불 것이고 그럼 해무가 움직일 것이다.
10분 정도 시간이 흐른 뒤 멀리 목포대교가 보였다. 하지만 해무 속 모습에 형태만 희미하게 보인다. 다시 해무가 덮기 전에 서둘러 사진을 찍었다. 새벽 6시 아쉬운 마음에 유달산을 내려왔다.
해무만 계속 찍었기에 심적으로도 지쳤었다.
아침 식사를 끝내고 회사 동료에게 연락이 왔다. 연락에 따라 계획했던 일정과 인원에 약간 변동이 생겼다.
회사 동료인 김민석이 서울에서 차를 끌고 목포로 온다. 답답한 마음에 바다를 보고 싶다고 목포까지 차 끌고 오는 상남자 되시겠다.
아침을 먹고 잠시 쉴 생각이었는데 쉬는 시간이 길어졌다.
잠부터 자고 나서 카페에도 가고 여유롭게 새 인원을 기다렸다.
사실 바다를 보고 싶단 이 친구에게 내가 말 못 한 게 하나 있었다.
저녁에 유달산으로 또 올라갈 일정이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바다 보여주겠단 말만 하고 전화를 끝냈다.
아무것도 모르고 청바지만 입고와 산을 오른 김민석에게 이 글을 통해 심심한 사과의 뜻을 전달한다.
4년째 목포에 오면 찾아가는 만선 식당으로 갔다.
밴댕이회 한 접시, 장어 간국으로 내가 목포 제1 맛집으로 찜한 곳이다. 만선 식당의 출신이 전라도라는 것을 나에게 다시 각인시키듯 수많은 찬과 함께 차려진 회에 소주 한잔 기울인다.
목포역 앞에서 중깐까지 먹고 나서야 다시 등산의 시간을 가졌다.
저녁의 유달산은 목포 해상 케이블로 산 중턱에서 시작했다.
일출 실패 때문인지, 아니면 한번 와봐서인지. 아침보다 어렵지 않게 일등바위에 올라올 수 있었다.
구름이 많지만 그래도 아까와 다르게 해무 없는 하늘이 너무 좋았다.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삼각대를 설치했다. 느긋한 저녁이다.
느긋하게 움직이는 배를 보며, 바다를 보며, 떨어지는 해를 지켜보며. 멍때리면서 감상했다.
오랜만에 생각 없이 있는 기분이었다.
내 삶에 있어 근거 없는 믿음이 하나 있다.
행복 총량제다.
누구나 행복의 양은 끝에 가면 같아진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지금의 불행은 언젠가 꺼지고 행복이 가득할 거란 생각이다.
반대로 행복하다면 지금의 행복을 충분히 즐기자는 생각이기도 하다.
근데 이 논리를 내가 원하는 곳에 이상하게 대입해 문제다.
오늘은 바로 좋은 사진 총량제다.
일출이 망했으니 일몰은 성공할 거란 막연한 자신감으로 변하는 것이다. 해가 수평선으로 향해 속도를 내며
떨어지는데 찍기도 전에 망함을 느껴버렸다. 카메라 초점을 다시 체크하고 구도도 다시 잡아봐도 망했다.
마음에 드는 사진을 이렇게 못 건지는 날도 있구나.
아까 멍때릴 때 몰랐는데 구름으로 수평선이 가려져 있다.
가려져 있는 수평선을 향해서 해는 속도를 내고 있었다. 가려진 해의 목적지 때문에 지금 저 높이가
오늘 볼 수 있는 마지막 해의 모습이란 생각이었다.
일몰 촬영에서는 해의 일몰 시점도 중요하지만, 일몰 이후의 시간도 매우 중요하다.
해는 사라지면서 마지막 석양 색을 하늘에 뿌린다. 이때 뿌려진 색에 일몰 이후 찾아온 남색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하늘이 펼쳐진다
. 이를 매직 타임, 골든아워라고 부른다.
하지만 오늘은 평범한 날이다. 마법도 황금도 없었다.
자리에 남아 야경까지 탐을 냈지만 케이블카를 타고 돌아가야 하기에 내려왔다.
아쉬운 마음으로 오늘 하루 유달산을 두 번 내려왔다.
산을 두 번 오른 탓에. 아니면 새벽 기상의 후유증에.
그날 밤 낙지탕탕이를 정말 힘겹게 먹었다.
근데 낙지탕탕이까지 계획이었는지.
호텔에서 마무리 캔맥주는 정말 시원하게 마셨다.
일정에 해방된 자유를 느끼며 한 모금씩 마셔나갔다.
다음 날 아침 해장국을 마지막으로 목포 미식 여행은 끝났다.
다시 차를 타고 힘겹게 올라갈 김민석에게 미안하게 나랑 오병혁은 기차를 타고 다시 올라간다.
사진을 별로 얻지 못했다는 생각에 목포역에서 기차까지 알뜰하게 찍었다.
글 쓰는 지금, 정리하면서 생각해 보니 여행의 절반은 성공했다.
미식과 사진여행 중 미식 여행은 대성공이었다. 일출과 일몰 사진에 대한 미련이 남지만,
나의 여행 행복 총량제로 그 부분은 미식 여행에 양보한 부분으로 해석된다.
아버지와 함께 맛볼 목포를 생각하며 기차 안에서 잠을 청했다.
앞으로 여행은 괴롭게 짜면 안 되겠다는 생각도 같이 말이다.
2022.06.24
맛있는 목포를 다녀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