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에 반한 상대와 여행을 하게 되는 건 어떤 경험일까. 다만..
스즈메의 문단속에서는 장신의 꽃미남인 소타에게 반한 여고생 스즈메가 가출한다. 평범한 여고생에게 이러한 가출의 당위성을 부여하는 것은 비상식적이다. 꽃미남 소타가 의자로 변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스즈메의 실수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다. 소타를 대신해 스즈메가 하는 일은 미미즈를 막는 일이다.
미미즈의 역할은 다가오는 상실을 시각화하는 것이다. 미미즈를 보게되는 건 이미 지진으로 엄마를 잃은 스즈메이며, 영화는 미미즈의 문을 통해 두 번째 상실의 두려움을, 무너졌던 세계에 사는 이에게 실존하는 공포의 진원지을 그린다. 감독은 미미즈를 통해 고통의 공유 불가능성에서 벗어나려 하는 것일까. 적어도 스즈메와 소타는 미미즈를 공유하고, 관객또한 그것을 본다. 미미즈가 생기는 곳 또한 실제 일본에서 대지진으로 피해를 입었던 곳이다.
일레인 스캐리는 고통의 공유 불가능성에 대해 말했다. "자신의 통증은 절대적으로 현존하는 것이지만, 타인의 통증은 도무지 잡히지 않는다는 것." ‘고통스러워하기’는 ‘확신하기’의 가장 생생한 예이지만, ‘통증에 관해 듣기’는 ‘의심하기’의 가장 좋은 예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통증은 부인될 수도 없고 확증될 수도 없는, 공유하기 불가능한 무언가로서 우리에게 나타난다."고 한다.
의자가 된 소타의 고통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인간성을 잃고 죽어가는 소타가 보여주는 건 고독이다. 소타가 겪는 고독은 일상에서 향유할만한 일시적인 고독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 앞에서의 고독이다. 타인과 관계의 단절이 영원이 되는 상태이며, 자신마저 느끼지 못하게 되는 고독이다. 영화 초반부 스즈메는 '죽는 건 두렵지 않아'라고 말할 때 그녀는 그 고독을 이해한 것 같지 않다.
그녀에겐 보호자인 타마키, 다이진과 함께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고통의 공유가능성에 대한 말을 아끼는 대신, 고독의 공유가능성에 대해 말한다. 스즈메는 다이진에게 고통을 말하며 그를 내던지려 하지만, 다이진은 스즈메에게 고독을 말하며 함께하려 한다. 스즈메와 보호자 타마키 또한 서로의 고독을 치열하게 말하면서 그들은 함께한다. 타마키의 고독의 말하기가 고통의 말하기가 될 때, 감독은 사다이진을 등장시킴으로써 그것을 막는다.
일레인 스캐리의 말처럼 고통이 깊어질수록 자신의 확신은 깊어지는 반면 타인의 의심 또한 깊어질지 모른다. 자신의 고통을 가장 잘 아는 존재는 어디에도 없기에, 가장 고통스러울 때 가장 깊은 고독에 빠질 것이다. 다만, 고통은 공유불가능할 지도 모르지만, 고독은 공유 가능할지 모른다. 소타와 다이진과 타마키의 고독을 본 스즈메가 자신의 고독에 대해서도 마주하는 것처럼.
영화의 마지막 순간 스즈메가 마주하는 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그 고독을 공유할 존재를 만날 것이라, 어릴 적 스즈메에게 성장한 스즈메는 말한다.
3월 11일은 어릴 적 스즈메가 엄마를 잃은 날이면서 일본에서의 개봉일이기도 하다. 이는 2011년 3월 11일에 발생했던 동일본 대지진을 상기시킨다. 다만, 감독은 그날의 고통보다는, 공유할 필요 있을 오래된 고독에 대해 말하려 하는 듯하다. 공유불가능했던 고통에 대해 공유가능한 고독의 형식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