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자렌지 May 08. 2022

로맨스의 쓸쓸함

 


 사무실의 점심시간, 졸음이 오는 찰나 직장동료 B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왔다.

 최근 직장동료 B는 소개팅을 받다. B는 소개팅 상대가 성격도, 외모도 괜찮다며 기대감을 가지면서도 뭔가 걸리는 것이 있다는 듯 말을 아꼈다. 그런데 며칠 후 동료 B로부터 듣게 된 건 아찔한 이야기였다. B는 전 여친이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것을 소개팅 상대에게 말했고 한다. 이전 여친을 잊지 못했다고 말이다. 소개팅을 주선한 직장동료 A는 동료 B의 행동에 답답해했다. 혹시 동료 B는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 아닐까.



 일반인 남녀가 한 공간에서 짝을 찾는 프로그램들이 흔해졌다. 그 곳에서는 모험적ㆍ경쟁설같은 로맨틱한 상황들을 유도한다. 종종 상황은 이렇다. 남자 A는 일편단심으로 B에게만 다가지만, B는 계속해서 A를 밀어낸다. 하지만 A는 B가 담스럼지만은 않게 성스럽게 직진했고, 결국 커플이 되었다. 혹시 동료 A도 이러한 연애의 시작을 바라던 것 아닐까. 첫눈에 반한 상대를 쟁취해내는 것, 혹은 상대의 적극성으로 시작되는 로맨틱한 연애 시작 말이다. 동료의 마음 모르지만 사실 스스로가 그랬다.



 어릴 적부터 몰입한 건 로맨스 드라마였다.

 그로써 미래의 로맨스를 꿈꿨다. 남들보다 그것에 몰입한 요인은 어릴 적부터 있었던 부모님의 불화였다. 부모님은 자식에 대한 사랑과는 반대로, 서로 간에는 사랑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두 분 사이의 앙심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쌓여있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역설적으로 마음 한 편의 기대를 품게 했다. 스스로의 가정을 비정상이라고 규정한 반면, 정상적인 어른들의 관계는 성숙하고 평화로것이라 생각했다. 이따금씩 보는 친구의 가정과, 드라마 속 연인들 그랬다. 부모님처럼 엉겁결에 결혼하지 않는다면, 잘맞는 짝을 만난다면, 화를 참는다면, 로맨스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미성년의 시간을 로맨스의 단계 중 모험으로써 인식했다. 이는 전쟁 이후의 보상되어야할 행복을 기대하게 했다.



 로맨스의 어원은 "중세 기사들이 겪은 모험과 사랑 이야기를 로만자로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로맨스물은 삶을 전쟁과 평화처럼 이분법적으로 나눈다. 고초를 겪던 신데렐라가 왕자를 만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기사들이 전쟁 후에 돌아와 평화로운 남은 생을 누린다는 낭만 같다. 그렇게 '놀이로써의 문학'이라는 로맨스는 전쟁을 겪은 기사와 신데렐라의 휴유증이나 트라우마는 물론, 계속되는 전쟁을 배제한다.

 


 어느 겨울, 기다렸던 로맨스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어릴 적 외로움을 보상받는, 소설 속 주인공이 된 경험이었다. 처음 만난 연인에게 관대했다. 마치 아기에게 미숙하다 할 수 없듯, 처음 시작된 사랑에게 관대했다. 하지만 그 시간은 금방 끝나버렸다. 모험적이고 정감적이라고 생각했던 장거리 연애는 곧 피로로 다가왔다.

 연애≠로맨스가 되는 상황에서, 오래 축적된 외로움 관계를 파탄시켰다. 사랑을 '최초의 경험'에서 '지속적 상태'의 단계로 옮겨가는 대에 실패했다. 에리히프롬의 말대로 였다. "강렬한 열중, 곧 서로 '미쳐버리는' 것을 열정적인 사랑의 증거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기껏해야 그들이 서로 만나기 전에 얼마나 외로웠는가를 입증할 뿐"인 것이었다.



 외로움은 왜 관계를 파탄시킬까. 교양수업의 첫 과제는 외로움에 대해 한 줄짜리 문장을 쓰는 것이었다. 수님은 학생들의 한 줄에 대해 자세히 해석해주었다. 그것이 한 학기 내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그리고 교수님이 쓴 외로움과 관계의 파탄이란 글을 봤다.

 "나의 외로움이 극복되자마자 너를 지우거나 너를 나의 외로움을 해소하는 일종의 수단으로 간주해버리는, 타인을 나의 욕망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삼으며, 너는 내가 원할 때만 있어야 하며, 이를 위반할 때는 단절과 절교의 수순으로 나아간다"는 글이었다. 



 이 문장은 면으로 날아와 가슴에 꽂히는 듯 했지만, 로맨스를 내려놓을 순 없었다. 상대의 단편적인 모습을 전체인 것처럼 이상화하게 했다. 하지만 이성과 친밀해질 때, 그 낭만은 멀어졌고 관계는 지속되지 않았다. 알랭 드 보통의 말처럼 사랑하는 사람에 빠진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사랑 그 자체에 빠졌던 걸까. 이성에게 받는 관심은 미술관의 작품 같았다. 미술관에서 보던 작품을 직접 받을 때처럼 이성의 관심을 받을 때 당혹스러웠다. 그것의 진위여부는 구분할 수 없었기에, 준 사람을 의심했다.



 타칭 사랑박사라는 알랭 드 보통 책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이러한 심리를 말한다. "자신과 같은 사람을 회원으로 받아들여줄 클럽에는 가입할 생각이 없다는 농담. 이 농담은 클럽 회원권과 마찬가지로 사랑에도 적용되는 진리이다...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에 빠져서 자신의 사랑을 보답받기를 갈망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꿈이 공상의 영역에 남아 있는 것을 좋아한다."[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청미래]



 알랭 드 보통은 강연에서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보다는, '왜 나는 너를 사랑할 수 없는가'에 대해 말한다. '왜 관계를 맺느냐' 보다 '맺고 있는 관계가 왜 어려운가'에 대해 방점을 찍는다. "문제는 우리 모두에게 상처가 있다는 걸. 모두 조금은 미쳤다는 걸.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비정상적인 모습을 비추는 거울 같은 존재라는 것."에 대해 말한다. 책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에서는 이를 더 적나라하게 적기도 한다.



 그 로맨틱 스피릿에 대해 경고한다. 우리는 '첫눈에 반해서 사랑에 빠지는 것이 평범하다고' 믿는 세상에 살고 있다고. 이 사회가 지나치게 로맨틱에 빠져있다고. 사랑은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라 생각하며, 이성보다는 감정과 본능에 지나치게 의지한다는 것에 대해 지적한다. 사랑에서 중요한 건 느낌이라, 이성 때문에 산산조각 난다는 생각에 대해 비판한다. 에리히 프롬의 책 '사랑의 기술'의 도입부에서도 마찬가지로 사랑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는 오류에 대해 말하며 시작한다.



알랭 드 보통은 사랑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은, 제대로 된 연인이 된다는 것은 로맨틱이라는 개념을 포기하는 일일 거라 말한다.

다만, 그것이 가치가 없었다고 보기엔 어려운 것 같다. 로맨스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가두는 공간이겠지만, 벗어날 수 있다면 그것은 일정 시간 몸을 숨겼던 방공호가 되지 않을까. 그렇게 다시 전쟁이 와도 숨어 들어갈 수 있는 방공호가 될지도 모른다. 벗어난다면.




* 커버 사진 출처 : pixabay.com







                    

작가의 이전글 작은 집의 쓸쓸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