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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자렌지 Jun 26. 2022

단정짓는 쓸쓸함

 


 그날은 섣불리 단정 지어 회사 동료에 화를 낼 뻔한 날이었다.

 시작은 갑작스러운 선배의 타박이었다. 선배는 내가 처리했다는 일로 나무랐지만, 듣는 동안 무슨 이야기인지 기억이 도통 잘 나지 않았다. 그 타박 후에 생각난 것은, 일주일 전 동료가 양해를 구하면서 처리한 일이었다. 그 일은 당연히 부장에게 보고하고, 다른 팀에도 공유를 하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 뒤 무책임하다는 핀잔을 들었을 때, 분노는 동료를 향했다.



 그가 일을 임의로 처리했다고 생각했다. 상처입은 감정과 부족한 정보는 순식간에 동료를 적으로 만들었다. 그가 일을 막 처리하는 사람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근거를 그의 과거에서 찾기 시작했다.

 그에게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었으면 좋겠다고 장문의 메시지를 남겼다. 이후 통화가 되었을 때, 차근차근 오해를 풀어준 건 동료였다. 임의대로 처리했을 거라 생각한 일은, 사실 부장에게 상세히 보고했고 담당자와도 공유된 일이었다. 다만 타박한 선배에게 공유가 안된 점을 그는 미안해했다.


 

 기분이 좋을 때는 긍정적 기억이, 나쁠 때는 부정적 기억이 더 잘 떠오른다. 기분 일치 효과라고 사람은 특정한 기분상태에 있을 때, 그 기분이었을 때의 비슷한 기억을 쉽게 회상한다고 한다. 누군가에게 과거나 미래에 대한 질문을 할 때, 대답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도 사실 현재의 감정상태라고 한다. 그렇게 감정이 손상되고 정보가 부족할 때 생각은 쉽고 빠르게 가장 부정적인 결론에 도달하기 쉽다.



 부정적인 단정을 가장 경계해야 하는 직업은 법조인일 것이다. 책 검사내전에서 김웅 전 검사는 이에 대해 말한다. "흔히 빠지는 오류가 상상력으로 사실을 만드는 것이다...(중략) 두 가지 사실이 있고 그 사이에 단절된 사실이 있을 경우 흔히 상상력으로 두 사실 간의 최단 거리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특히 익명성과 함께 타인을 자각하기 어려운 온라인에서는 쉽게 단정짓는 경향이 있다. 흥미가 될만한 추측성 글과 찌라시, 루머, 편견을 강화하고 차별하는 글들이 많다. 과거 어느 대학생이 같은 학교 학생들의 입시전형을 나누어 신라의 계급이었던 골품제에 비교한 것은 논란이 되었고, 근래에는 어느 아이가 친구들의 주거형태를 나누어 비하하는 단어를 합쳐서 쓰면서 논란이 되었다. 이는 단편적인 정보로 쉽게 결론을 암시하는 미디어를 통해 더 훈련된 결과가 아닐까.



 신형철 작가의 말에 의하면 쉽게 단정 지을 때 폭력이 시작된다. "폭력의 외연은 가급적 넓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이런 정의를 시도해본다. 폭력이란? 어떤 사람/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모든 태도이다. 단편적인 정보로 즉각적인 판단을 내리면서 즐거워하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나는 느낀다. 어떤 인터넷 뉴스의 댓글에, 트위터에, 각종 소문 속에 그들은 있다. 문학이 귀한 것은 가장 끝까지 듣고 가장 나중에 판단하기 때문이다."


  

 가장 나중에 판단하는 건 뭘까. 문유석 작가(전 판사)는 고등학교 강의 중 학생들에게 가상의 폭력사건을 이야기하고 적정한 형을 정해보라고 질문했던 일에 대해 말한다. 듣자마자 "어우 무기징역, 무기징역"이라는 수군거림도 있었지만, 질문을 받은 한 학생의 대답은 판사 같았다고 한다. "좀 더 많은 사항을 알아야 형을 정할 수 있다고" 진지한 문답이 이어지고, 문유석 작가는 일부러 과한 양형으로 몰아가며 스스로도 학생을 괴롭혔다고 표현하지만, 학생의 신중한 태도와 답변에 결국 이것이 판사가 하는 일이라고 결론지었다고 한다.



 가장 끝까지 듣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사람들은 대개 나이가 들수록 말하는 체력은 좋아지지만 듣는 체력은 오히려 약해지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잘 들어주는 어른을 만나는 일이 있다. 그런 분에게는 잘 듣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런 분을 따라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그리고 유튜브를 끊으면서 듣는 체력이 좋아지는 것 같다. 다른 직장 상사나 어머니의 잔소리같은 일방적인 말들이 더 재밌어지지는 않았지만 분명 덜 지루해졌다. 퇴근 후에는 글이라는 표현의 수단을 가지면서, 말하고 싶은 욕구에 대해 조금은 여유로워졌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는 일을 하며 참 논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책은 무언가를 쉽게 판단하고 단정짓게 하기도 하지만, 쉽게 단정짓지 못하게도 다. 요즘은 후자의 책에 관심이 있다. 책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의 어느 독자는 서평으로 “내 평생 한 권의 책을 읽어야 한다면 이 책을 읽을 것이다” 말을 남겼다. 이 책은 어떤 것도 쉽게 단정짓지 않으려는 작가의 태도가 돋보이는 책이다. 책의 저자인 나티코는 "17년 동안 승려로 살면서 배운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무엇입니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다 믿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라고 답하며 책의 포문을 연다. 책 '왜 나는 네 말이 힘들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저자는 우리의 대화가 힘든 원인에는 머릿 속에서 바로 떠오르는 '자동적 생각'에 대해 말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최진석 철학교수님은 가장 철학적인 것은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끝까지 듣는다는 건, 수집할 수 있는 건 다 수집하는 일인 것 같다. 그것은 계속 찾고, 묻는 일과도 비슷하다. 단정짓는 대에 의지가 필요하다면 그 의지는 불필요한 것을 다 잘라내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전부 살펴보면서 보지 못하고 고려하지 않은 부분은 없게 하겠다는 의지가 아닐까.




* 커버 사진 출처 :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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