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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자렌지 Apr 21. 2022

쉬고 싶은 쓸쓸함

 


 걷기 모임에서는 다양한 사람을 만다. 그날은 힙합을 좋아하는 분이 나왔다. 그는 먼저 말을 걸어줘서 고맙다며, 참고 있었다는 듯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직설적인 표현으로, 낯선 이와도 어울리고 싶은 욕구에 대해 말했다. 그는 대중매체의 어느 래퍼처럼 대화할 때 굳이 거친 표현들을 쓰기도 했다. 그의 취미는 랩의 가사를 쓰는 것이었는데, 그는 힙합의 어떤 것(?)을 추구했다.



 젠가부터인지 래를 선택하는 대에도 의미를 찾는 강박을 느꼈다. 에게 추천받은 힙합으로 멜론 재생목록을 채우면서 자연스레 힙합의 유래를 찾았다. 그것은 논쟁으로 뜨거웠다. 힙합이 흑인들의 저항정신으로부터 유래되었는지, 아니면 파티에서의 즐거움에서로부터 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엉덩이를 흔드는 것(Hip hop)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사회의 풍자인지, 그저 파티에서의 흥을 위한 것인지였다.



 의미 즐거움이냐 하는  스스로에도 던져야 할 이었. 둘의 균형이 무너져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군대에서부터 즐거움은 하찮아졌다.

 그곳의 상급자들은 안도현 시인이 말한 '야리야리한 영혼을 딱딱하게 만드는 폭력의 운전사' 같았다. 그곳에서 평균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즐거운 건 포기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감정을 억압하며 나는 로봇이다라는 말을 수없이 되내인 후에야 그곳에 적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진짜 휴가에서조차 쉼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전역을 하고서는 음악 듣기는 성가신 취미가 되었다. 무턱대고 서라도 이어폰에는 영어가 들리도록 해야 했다.

음악을  취미 술자리였다. 하지만 주량과 시간의 압박감 덕에 술자리를 자제하면서, 자주 드나드는 장소는 막걸릿집에서 도서관으로 바뀌었다. 정적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공간에서, 정적뿐인 공간으로 바뀌게 되었다. 동기가 자취방 현관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집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척 정적으로 일관하던 때였다.



 현재의 즐거움에 빠지면 미래는 없다고 생각했었다. 맘 놓고 빠지기에 그것은 깊은 늪 같았다. 빠져 들 수 있는 놂은 사치스러운 것이었으며, 최소한의 쉼만을 스스로에게 허락할 수 있었다.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 뛰어야 한다.', '잠은 죽어서 자면 된다.'라는 문장은 몸속에 참고 넣을만한 좌약 같았다. 그것은 놂에 대한 죄책감을 각성시켰다. 약이 체질을 바꾸어 놓았을 쯤에 취업을 했다.



 직장에서도 같은 체질의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그들 또한 스스로에게 최소의 쉼만을 허락하는 것 같았다. 일의 스트레스 퇴근 후에는 끊어내기 위해서라도, 일은 삶의 1순위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연애와 결혼의 가치를 인정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연애를 통해서 죄책감 없이 쉴 수 있었다. 또한 미디어는 고칼로리의 음식을 푸짐하게 먹는 것을, 의미 있는 놀이로 취급해 주었다.



 연애가 쉼이 되어주는 듯하다가 5년이 지났다. 꾸준한 과식과 피로, 간만의 과음으로 배꼽에 염증이 났다. 소화 잘 안 되는데 과식하고, 커피를 마시거나 근력운동을 하면 구역질이 날 때였다. 한의원에 갔다 결국 외과로 발걸음을 돌렸다. 배꼽 찢는 고통을 참고, 벌벌 떨면서 매일 드레싱을 받으러 갔다. 마지막날에 선생님은 재발하면 개복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잘 쉬고 건강해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히 들었다.


 

 쉼을 어떻게 찾아야 할까. 어느 드라마에서는 쉼을 잃어버린 두 남녀를 보았다. 드라마 '그해 우리는'는 전교 1등과 전교 꼴등 고등학생을 찍는 다큐멘터리로 시작한다. 전교 1등 국연수 집요하게 공부를 추구하고, 전교 꼴등 최웅은 쉬는 것을 추구한다. 하지만 10년이 지나 둘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둘은 '일'만 추구하는 사람이 된다. 특히 최웅은 유명 작가가 되었지만, 쉬는 법을 잃어버린 사람 같다. 최웅은 드라마 전반부에서 거의 잠들지 못한다. 최웅의 '잠'은 국연수가 집에 와야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최웅은 과거 연인이었던 국연수와 헤어지며 '쉼' 마저 잃어버린 것 같다. 그러나 최웅은 다시 만난 국연수는 물론 쉬는 것과도 화해하지 못한다. 국연수에게 삐져있는 것처럼 화를 내고, 매일 밤 불면증에 시달린다.



 어른이 되는 것은 노는 것에 실망하고, 쉬는 것마저 거리를 두는 것일까. 인디밴드 '가을방학'의 노래 가을방학의 가사처럼 "싫은 걸 참아내는 것만큼 좋아할 수 있는 마음을 맞바꾼" 걸까.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연애로써 서로를 위로했고, 쉼과 놂을 완성해 갔고, 삶의 균형을 잡았다. 하지만, 드라마처럼 연인에 대한 응원과 위로가 쉼과 놂이 마냥 쉽지 않았다. 그렇게 연애는 드라마 같지 않게 끝났다.





* 커버 사진 출처 :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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