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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자렌지 Apr 05. 2022

혐오의 쓸쓸함

넷플릭스 '지옥'(2021), 우월감 트라우마



정의의 여신 디케의 조각상은 저울과 칼을 들고 있다. 오른손으로는 죄의 경중을 재기 위해 저울을 높이 들고 있고, 왼손에는 형벌의 칼을 쥐고 있다. 디케 조각상처럼 온라인상의 사람들 또한 한 손에 저울, 한 손에 칼을 들고 있는 것 같다. 다만, 디케 여신상과는 달리 저울과 칼을 바꿔 잡은 듯하다. 그들은 칼을 높이 쳐들고 거울은 떨어뜨린 것처럼 보인다. 



 기다렸던 일요일 아침이었지만, 처음 확인한 소식은 유명인이 각각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뉴스였다. 젊은 청년의 남자와 여자였다. 청년남성은 국가대표까지 발탁된 운동인이었고, 여성은 입담으로 사랑받는 방송인이었다. 그들은 왜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그들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남자는 동료 배구 선구가, 여자는 자신의 어머니가 악플로 인해 극단적 선택을 했다. 그러한 그들의 약점을 파고드는 악플러들의 집단 린치는 도를 넘었다. 결국 둘마저 악플에 노출되어 극단적 선택을 했다. 



 책 '트라우마 한국사회'는 한국사회의 우월감 트라우마를 적나라하게 말한다."자신이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못난 것 같으면 괴로워하고,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잘난 것 같으면 즐거워하는 심리, 온갖 건수를 빌미 삼아 타인을 무시하고 깔보는 심리”라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트라우마는 면역체계가 접근 불가한, 상흔의 위치를 알 수 없는 상처일 것이다. 그들 또한 치료받고자 자신의 상처를 드러냈을 때 가해진 폭력은 트라우마가 됐을 것이다. 그렇게 상처를 드러난 이에 대한 폭력을 합리화하고 있을 것이다.



 오징어게임에 이은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2021)은 이러한 한국사회에서 잔혹한 대중을 묘사하는 듯하다. 그 잔혹함에 타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처벌받지 않은 범죄자의 심판'이라는 논리이고, 대중은 피해자에게 인과응보라는 듯이 비난한다. 괴물이 죽음을 예언하고 살해하는 것이 현실이 된 디스토피아에서, 대중은 허울뿐인 종교의 논리를 맹목적으로 추종한다. 그렇게 사람을 죽이는 주체는 괴물로부터 사람으로 확장된다.



 온라인은 공간의 제약 없이 결집된 다수의 폭력을 허용한다. '지옥'에서의 낙인찍힌 이를 죽이고 사라지는 괴물이 존재하는 것처럼, 현실에서도 의혹만으로 누군가의 죽음을 추종하고 사라지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듯하다. 익명성에 숨어 미지의 괴물이 될 수 있는 그들은, 의혹만으로 사람들이 모여 집단 리치를 가한다. 피해자가 치료의 불가능을 느끼고 죽음에서만 안식의 가능성을 찾을 때, 가해자는 스크린 너머로 돌아가 안식한다. 



 외국에서는 죽음 혹은 죽음준비교육이라는 교과목이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죽음에 대해 교육을 하고, 필요성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죽음에 관해 함부로 말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청소년기에 그러한 교육은 필요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을 충분할까.

 책 당신이 몰랐던 K(박노자)에서 글 '당신이 밟히지 않을 권리'는 청년 75%가 한국을 떠나고 싶다는 한겨레 기사에 대해 말한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되고 나서도 응답 자기 60.8%가 갑질이 여전하다 느낀다는 보도도. 



 책에서는 젊은이들이 이 나라를 떠나고 싶어 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연장자, 권력자에게 일상적으로 밟히면서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사람이 사람을 밟고 다니는, 민주화되지 않은 일터의 분위기에 대해 말한다. 폭력은 폭력은 낳고 혐오는 혐오를 낳을 것이다. 스스로라도 폭력과 혐오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떡해야 할까. 분노나 낙루에 호소하지 않고 정확하게 말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적어도 신형철 작가의 말은 그것에 작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신형철 작가는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장승리 시인의 '말'이라는 시를 언급했다. 그것은 삶의 의미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한다기보다,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완곡함과 반성이었다. 

 그 시에는 '잘못했어 잘못했어' 라며 참회하는 사람이 나온다. 다만 시의 화자는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채 혓바닥이 벗겨질 때까지 빌고 있는 사람이다. 작가가 말하는 것은 이와 반대인 죽음이다. 그가 말하는 '선물 같은 죽음'은 누군가에게 잘한 것도 없지만, 잘못한 것도 없는 용서를 빌 필요 없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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