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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자렌지 Feb 15. 2023

그의 불행이 올 때

'택시운전사'(2017)


'현실을 산다'는 것과, '현실에 다가간다' 라는 두 문장에서 현실은 차이가 있어 보인다. 전자의 현실이 '자신'의 것이라면, 후자에서의 현실은 '타인'의 것이라는 의미가 돋보인다. 그녀와의 관계에서의 갈등은 스스로의 현실만을 보았을 때 발생했다. 그러고 보면 몇 년 전, 공감에 대해 말하는 강연과 책이 쏟아져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식인들이 동시에 입을 맞추기라도 한 듯 공감의 중요성을 말했다. 



 그 시기는 식인들이 이성과 규범의 사회에서  감정의 중요성을 말한 시기는 아니었을까.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갈등으로부터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그들이, 두 손 두 발 다 들고 투항하며 공감의 필요성에 호소하는 것 말이다. 리더의 자질에는 통제력이 아닌 공감과 소통이 떠올랐고, 그 시기의 미 오바마 대통령은 총기규제에 대해 눈물로 호소하기도 했다. 



신형철 평론가는 문학을 해석하는 방법인 사건, 진실, 그리고 응답이라는 세 단계는 타인을 공감하게 되는 프로세스 같다. 사건을 바라보는 주인공의 인칭이 3인칭, 2인칭, 1인칭으로 카운트 다운되는 변화와 비슷하다. 이는 그들의 이야기가 너의 이야기로, 그리고 나의 이야기로 되는 과정일 것이다.



영화 택시운전사(2017)는 광주에서 일어났던 사건에 대해 택시운전사 만섭이 응답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영화는 도입부의 긴박함을 암시하는 상황에서 한국을 빠져나오는 외국인 기자와, 한국의 광주로 들어가는 기자 힌즈 페터를 대조한다. 이는 영화 초반부 광주를 빠져나오려고 했던 만섭과 영화 후반부 다시 광주로 들어가는 만섭과 유사하다. 





 만섭에게는 무슨 일들이 있었던 걸까. 만섭은 얼른 광주를 빠져나오려 했지만, 계획은 우연들로 연기된다. 첫 번째는 받지 못한 운임이었고, 두 번째는 망설임 끝의 선의였고, 세 번째는 인정에 대한 멋쩍음과 체면이었다. 그렇게 만섭은 그곳의 진실에 대해 마주한다. 그곳은 폭격(爆擊)에 필적하는 폭력(爆力)이 휩쓸고 있는 곳이다. 


 

 그 폭력(爆力)은 약자를 구원하려는 이에 대한 폭력과 유린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예수가 겪은 그것과 비슷하다. 로마 병사들은 골고다 언덕까지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예수를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질한 이후에 그의 속옷을 가지려 제비를 뽑으려 했다. 그런 인간성의 상실이 여러 운명들로써 충족된다면, 인간성의 회복도 마찬가지인 걸까.



 광주를 빠져나온 만섭은 홀로 키우는 딸이 기다리는 서울과 참혹한 광주 사이에서, 어느 쪽을 선택해도 울분이 남을 현실에 어린아이처럼 운다. 그렇게 만섭은 사건에 대해 3인칭의 일이 아니라 1인칭인 나의 일로 응답하며 다시 광주로 차를 돌린다. 광주의 사건에 대해 줄곧 3인칭으로 평점심을 유지하려던 서울 택시기사 만섭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베를린 여행에서 기억에 남았던 건 '학살된 유럽 유대인에 대한 추모비'(Memorial to the Murdered Jews of Europe)였다. 그곳은 천 개가 넘는 기둥이 미로처럼, 한 사람이 겨우 다닐 정도로만 빽빽하게 줄지어있다. 그 촘촘한 기둥 안쪽으로 들어가기 시작했을 때, 이렇게 걸어 다니기 힘들지만 걸어 다닐 수는 있게 만들었는지 의아했다. 비좁은 공간에서 빨리 안쪽으로 갈 수도, 빨리 바깥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점점 안쪽으로 계속 걸어가다 보니 만들어진 바를 느낄 수 있었다. 이 추모비들의 빼곡한 배치는 단단하고 비좁은 비석 사이를 걷는 이의 압박감을 유도하도록 한 것이었다. 점점 낮아지는 지면과 높아지는 비석들이 사이를 걸을 때 내리 눌리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이곳을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지 느끼게 해 주겠다는 듯이 만들어진 것 같았다.



 주위 비석의 길이와 두께와 넓이 또한 제각각이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키와 체형과 몸무게가 다양한 어른과 아이, 노인이 누워있거나 앉아있거나 서있는 것을 표현한 것임을 생각할 수 있었다. 그 공간을 먹먹히 지나다가 지하 전시실에 내려갔을 때, 그곳에는 수용소에서 유대인이 썼던 일기들이 석판에 줄지어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수용소 생활이 구겨지고 찢어진 종이로 남겨진 것을 읽어갔다.



 눈 앞의 글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 글은 수용소에 갇힌 불행을 심각하지 않게 받아들이기 위해 애쓰는 글이었다. 슬픔이 몰려왔다. 그가 적은 문장에 동화되어 다 읽기도 전에 눈물이 터졌다. 전혀 다른 시공간에서 살았던 얼굴도 나이도 이름도 모르는 유대인이 쓴 글 이었다. 하지만 전혀 다른 세계에서 100년 전에 죽은 사람의 문장이 목소리처럼 생생하게 다가왔다. 다 지나갈거라 바랬지만, 결코 그럴 수 없었던 그 불행 속에 나와 비슷한 누군가가 있었다.  




사진 출처: 영화 택시운전사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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