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넷플릭스나 유튜브로 보는 게 하루 루틴이 되었지만, 스마트폰 이전에는 P2P 사이트의 영상이 있었고, 그전에는 비디오나 만화책을 빌리는 것이 루틴이었다. 그 세대라면 비디오나 만화책의 연체료로 긴장했던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디오방도 용돈이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지상파에서 저녁 6시에 맞춰 방영되는 애니메이션 한 두 편이야말로 초등학생들의 소확행이였다.
도에이 애니메이션의 고조 회장은 아이들에게 우정, 노력, 승리들을 말하는 방법으로 일본 애니의 애정에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디즈니를 모델로 일본의 패전 이후의 어린아이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한 방편이었다고도 한다. 슬램덩크에서 강백호는 승리와 노력에 대한 단순함과 낙관성으로 사람들을 매료시킨다. 성장과 행복의 조건 중 하나인 낙관성이다. 하지만 슬램덩크는 일본경제에서 버블의 기간에 연재를 시작해서, 일본의 장기불황 중에 끝났다.
30년이 지나 리메이크되는 슬랭덩크는 단순함과 낙관성과는 반대되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 주목하는 건 송태섭의 상실이다. 송태섭은 어릴 적 아버지와 형을 잃었고, 그 상실 속에서 엄마와 버텨내는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말하는 대에 공을 들인다. 그래도 송태섭은 농구를 계속한다. 그에게 세상은 아버지와 형을 앗아갔으며, 엄마와 농구라는 걸 남긴 존재다. 세상을 긍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태섭은 죽은 형의 나이를 훌쩍 넘겨버렸고, 형이 바랬던 무대의 상대를 만났다. 다만, 상대에 비해 너무 열세라는 것이 문제다. 후반 전에 북산과 산왕의 경기에서 점수차는 20점까지 벌어진다. 송태섭은 두 명에게 집중마크 당하며 계속 공을 뺏긴다. 그 과정에서는 주장 채치수는 1:1 대결에서 신현철에 밀리며 패배감에 젖어들며, 에이스 서대웅또한 경기를 잘 풀어내지 못한다.
경기 중 과거의 회상은 앞으로 에서 나아가야 하는, 패배할 수 없는 이유가 된다. 채치수처럼 독불장군이었지라도, 정대만처럼 부상으로 좌절하고 농구를 관뒀을지라도, 송태섭처럼 아버지와 형을 잃고 문제아였더라도, 지금은 농구로써 삶의 의미를 찾고 있다.
그래서 과거 정대만과 송태섭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우는 장면은 중요하다. 자기혐오에 빠진 서로를 흠씬 패주고 멍투성이가 되어서야, 둘은 나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송태섭은 죽은 형을 뛰어넘으려 할 수 있었고, 정대만은 농구를 다시 할 수 있었다
영화 초반, 태섭의 엄마는 농구를 계속하는 태섭으로 인해 죽은 송준섭을 떠올리며 힘들어한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 태섭의 엄마는 죽은 송준섭의 농구경기 비디오에서 해맑은 어린 송태섭을 본다.
이 회상장면 이후에 송태섭의 엄마가 몰래 경기장에 와서 '뚫어'라고 하는 대목에서, 체력을 다했던 송태섭이 압박수비를 뚫는다. 짐승이 가시덤불을 네발로 헤쳐 나오는 듯한 이 장면은, 과거의 상실을 뚫고 나오는 듯한 송태섭을 보여준다.
마지막 태섭과 엄마가 화해의 대화를 나누는 장소는 관광객들이 휴양을 즐기고 있는 오키나와의 해수욕장처럼 보인다. 둘에게 그것은 두 명의 가족을 앗아간 세상과의 화해로 보인다. 공교롭게도 태섭의 고향 오키나와는 점과, 북산과 산왕이 맞붙는 인터하이가 펼쳐지는 히로시마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오키나와는 과거 태평양전쟁의 격전지로써 , 미국과 일본의 양측 군대의 피해가 엄청났던 전투이다. 미군이 원자폭탄을 쓰기로 결심하는데 큰 영향을 준 전투이기도 하다."
영화는 상실했기에 회복해야 할 것이 있음을 말하려는 것 같다. 고통스러웠기에 앞으로는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송태섭의 상실을 말하면서 작가가 바라는 것은, 우리가 슬램덩크에 열광했던 그 시기에 감동과는 반대편에 있었던, 우리의 결핍과 상실을 회상하게 만들려는 것은 아닐까.
사진 출처: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 포스터